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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휴, 정말 바보로구나. 위에 한줄문장을 보고 울릉도와 죽도만 있다고 판단하냐. 껄껄. 언제부터 사료에 있는 글 하나만 보고 결론을 내리디. 병신.
내가 준글을 제대로 좀 읽지그래.
태종 17년 2월에는 우산 무릉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육지로 옮기고, 섬을 비우는 쇄출정책(울릉도-독도에 대한 海禁政策)을 확정짓게 된다.(『태종실록』권33, 태종 17년 2월 乙丑條) 그리고, 세종 7년 10월에는 김인우가 우산무릉등지의 안무사(于山武陵等處安撫使)로 파견되어, 주민 20명을 데리고 나왔다.(『세종실록』권30, 세종 7년 10월 乙酉條) 이 ‘우산무릉등처’를 ‘우산 지방의 무릉도 등 모든 섬(김병렬, 위 책(1997). 165쪽)’으로 볼 수도 있고, ‘우산도, 무릉도 등지’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임영정은 이 우산무릉등처라는 직함은 동해상에 울릉도와 더불어 우산도가 존재하며, 이 우산도가 울릉도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공도화 정책 시행대상이 될 만큼의 규모로 중앙에서 알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 하였다.(「朝鮮初期 鬱陵島와 獨島의 經營」,『현암 신국주박사화갑기념 한국학논총』, 1985, 152쪽)
아무튼 우산국을 하나의 정치체가 아닌 단순한 섬들로 파악해가는 과정 속에서, 울릉도의 부속도서 중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독도는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파악되어 가게 된다. 그런데, 조선전기까지는 우산국의 옛 땅이었다는 인식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어, 가장 큰 섬인 主島 울릉도를 우산이라고 파악하기도 하고, 무릉 혹은 울릉이라고 파악하기도 해, 울릉도와 독도의 위치와 크기 및 명칭에 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산국이 울릉도와 독도로 분리되어 두 개의 섬으로 파악되고, 이 두 섬이 우리의 영토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과정을 조선전기에 편찬된 대표적인 관찬 지리지들을 대상으로 확인해보자. 1432년(세종 14)에 편찬된『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의 울릉도·독도에 관한 기록이다.(이 내용은 1454년(단종 2)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그대로 실리게 된다) “우산 무릉 두 섬이 (울진)현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는 우산국이라 칭했으며, 울릉도라 하기도 했다.(于山武陵二島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新羅時 稱于山國 一云鬱陵島 ... (「세종실록」 권153, 地理志 江原道 三陟都護府蔚珍縣條))”라는 이 기록에서 ‘날씨가 맑으면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두 개의 섬’은 울릉도와 독도밖에 없으니, 이것은 곧 독도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울릉도와 독도의 지리적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섬들을 신라 때에는 우산국이라 했고, 울릉도로 통칭하기도 했다는 것을 명료하게 말해 주고 있다.
니말대로 울릉도와 죽도만 있다고 선조들이 판단했다면 어째서 고작 2~30년도 안되는 사이에 세종이 독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지리지에 써 놓았겠냐. 니가 말한 죽도는 울릉도에서 비가오나 눈이오나 그냥 보이거든. 울릉도에 한번 가보지도 못했으니까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나 써놓지. 독도도 안보인다고 그러지.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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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주까리 to 역갤 블로그 at 4/21/2006 09:43:32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