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 최초의 대학이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보다 넓게 세계 최초의 대학이 어디인가 옛날에 잠깐 고민해봤던 사람으로써, 한마디 하고 싶군요.
일단, 개인적인 학벌 관련 감정은 철저히 배제하고 논의를 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학벌 감정을 앞세우는 건 마치 독도 논쟁에서 민족주의를 앞세우는 것과 동일합니다.
결국 쇼비스트나 훌리건 비슷하게 몰리고, 비슷하게 이익을 얻는 동류들 빼고는, 아무도 그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보통 이런 논쟁은 대학의 정의부터 정확히 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근대적인 의미의 대학이 뭔가 제대로 정의되어야, 예를 들자면 성균관이 최초의 대학이냐, 아니 서울대, 또는 숭실대나 고려대이냐 같은 논의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근대적인 의미의 대학의 정의가 중요한 이유는, 이미 고려 성균관보다 훨씬 전에도 단순한 교육 기관은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육이란 인류 문명의 역사와 비슷하게 존재해 왔고, 교육 기관 또한 그러합니다.
과거의 교육 기관들과 지금의 대학들은 분명히 다릅니다.
지금의 대학들은 그 기본 철학에서 과거 고려나 조선의 교육기관들보다는 유럽의 초기 대학들을 보다 더 분명히 계승하고 있고, 그 철학적인 밑바탕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단순히 옛날의 모 교육기관을 이름이나 뭔가 애매한 정신 따위를 모호하게 계승했다는 논리로 밀어부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참고로 제가 나온 대학은 한국 최초의 대학은 분명히 아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류의 논쟁은 자신의 출신 대학에 대한 어설픈 감정을 절대 배재하고 냉정하게 봐야 한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University 즉 대학의 정의부터 확실히 해야 한다는 점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체입니다.
구글 앤서즈의 세계 최초의 대학에 대한 글을 참고로 첨부합니다.
http://answers.google.com/answers/threadview?id=428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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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랑 따윈 필요 없는 여름 to 역갤 블로그 at 5/31/2006 07:49:56 AM
뭐 가갹햏이 할복이라도 하리? 사람 과거가지고 뭘 그리 물어뜯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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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돈데기리 to 역갤 블로그 at 5/27/2006 11:30:37 PM
저희 학교는 건학 608년 입니다.ㄳ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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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젠장 to 역갤 블로그 at 5/27/2006 04:46:29 PM
저희 학교는 건학 608년 입니다.ㄳ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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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젠장 to 역갤 블로그 at 5/27/2006 04:45:43 PM
13세기 이후에는 전문용병들의 실력이 우수하다고 하는데. 기사들도 용병을 두려워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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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흐음 to 역갤 블로그 at 5/27/2006 02:00:55 AM
도대체 힌덴부르그에게는 어떻게 했길래 저렇게 잘 보였을까 싶소? 게다가 아들까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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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nonymous to 역갤 블로그 at 5/26/2006 05:27:37 PM
싫음 보지 말던가. 역겔도 아니고 여기까지 따라와서 시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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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로직 to 역갤 블로그 at 5/26/2006 10:12:29 AM
맨날 고려대 얘기냐
지겹다 지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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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적당히 좀 해라 to 역갤 블로그 at 5/26/2006 06:40:24 AM
대학 순위 배틀 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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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山城 中大兄 to 역갤 블로그 at 5/25/2006 12:27:08 PM
물론 이론상으로 친자확인은 100% 가깝게 가능하다고 합니다. 의대 다니는 친구 여친 말로는 야매로 하지 않는 이상 그렇데요. 하지만 그건 이론상이지요. 자식 머리카락 뽑아다가 친자확인을 한다는데 좋다고 할 엄마가 어디 있겠습니까? 호주제 폐지하고 친양자 제도 실시하고 싶다면 그 이전에 제도로써 아이가 태어나면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것을 의무적으로 실시하도록 법을 만들어야 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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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로직 to 역갤 블로그 at 5/25/2006 02:27:39 AM
다른 곳에 썼던 글인데 그래도 역사랑 쬐매는 관련있는 거 같아서 퍼왔습니다. 요즘 하도 글이 안올라오는 듯 해서요. 흠흠.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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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로직 to 역갤 블로그 at 5/25/2006 01:38:23 AM
아닌데요. 크라수스는 마리우스와 술라시대에 살생부에 올라진 인물들의 물건을 헐값에 사고 다시 팔아 부자가 됬는데... 로마인 이야기 3에 나와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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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ho to 역갤 블로그 at 5/24/2006 12:23:56 AM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후속도 기대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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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22/2006 02:06:51 AM
회장 하고 싶은 사람이 없는가 보군. 그럼 내가 계속 운영하라는 뜻으로 알고 종료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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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22/2006 01:47:41 AM
송태조 사칭인줄 알았더니 진짜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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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22/2006 12:31:30 AM
훗 나처럼 순수하고 정직한 사람을 그렇게보다니 어떻게 그럴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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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충성용감단결 to 역갤 블로그 at 5/21/2006 08:55:36 PM
두 나무꾼이 이웃에 살고있었다. 어느날 한 나무꾼이 다른 나무꾼에게 도끼를 빌려달라고 하자 그 나무꾼은 거절했다. 얼마뒤 도끼를 빌려주지 않은 나무꾼이 도끼빌려달라던 나무꾼을 찾아가 도끼를 빌려달라고 말했다. 만약 그 나무꾼이 "네가 전에 내게 도끼를 빌려주지 않았으니 나역시 네게 도끼를 빌려주지 않겠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복수이다. 하지만 그 나무꾼이 "너는 내게 도끼를 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네게 도끼를 빌려주겠다."라고 하면서 도끼를 빌려준다면 그것은 증오이다.
낄낄 송태조횽은 과연 어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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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玉蔚亞育護 to 역갤 블로그 at 5/21/2006 08:32:25 PM
갸갹=인조이 아이디 Dymaxion.
왜 회피하는거야?
당신이 인조이 재팬 청산리전투 논쟁에서 뻘짓하다가 논파당해 네이버 총독부가 결성된 책임은 어떻게 질거냐고?
당신의 얼굴은 철판 티타늄 합금재질이라도 되는거야?
부끄러운줄 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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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랜스키 to 역갤 블로그 at 5/21/2006 11:44:13 AM
플레이트 아머들의 무게에 대해서는 다음의 링크를 참고.
http://kr.dcinside7.imagesearch.yahoo.com/zb40/zboard.php?id=history&page=1&sn1=&divpage=1&banner=&sn=on&ss=off&sc=on&keyword=미스트&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595
리플 중에는 동양 갑주에 대한 의견도 있습니다. 자세한 차이는 나중에 정리해서 올려 보도록 하지요.
일단 말씀드리자면 갑주의 무게의 차이는 사실 방어범위를 얼마나 늘리느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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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충성용감단결 to 역갤 블로그 at 5/21/2006 12:19:21 AM
저도 무게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 갑주의 무게는 차이가 많이 납니까? 아무래도 동양인과 서양인의 근력 차이가 있을테니 동양의 갑주가 가벼울 거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얀듀고츠 연대기를 보니 몽골인이 힘이 세다고 나오더군요. 이걸 보면 또 별 차이가 안났던 것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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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20/2006 10:18:56 PM
저때 물가로 전투기 한대 값이 될만 하겠습니다-_- 무게 면에선 어땠나요? 30Kg 내외였다고 얼핏 본 것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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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카이호크(Skyhawk) to 역갤 블로그 at 5/20/2006 10:11:24 PM
형안녕 혛이 날 싫어해도 그래도 나는 혛편이야 옥울아육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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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충성용감단결 to 역갤 블로그 at 5/20/2006 12:47:58 PM
그렇겠지. 다만 조선시대는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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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20/2006 10:53:52 AM
울나라 왕조들의 일종의 편법이 아니었을까? 진흥왕도 중화제국의 책봉국 주제에 '순행'을 했고 독자 연호 쓰려고 발악한 거도 있고, 독자 연호는 중국하고 사이 좀 안좋아지면 계속 쓰자고 튀어나온거고. 조선은 용비어천가에서 아예 자기네가 천명을 받았다고 선포하잖아. 어떤 왕이든간에 천자, 황제 이런거 하고싶지. 지가 다른 왕보다 잘났다고 믿고 싶겠지. 근데 하면 쪽박나니까 차마 대놓고 내가 황제라고는 못하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나도 중국 못지않다 이런 얘기를 하려고 했던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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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朴下史湯 to 역갤 블로그 at 5/20/2006 02:10:54 AM
이 때 전투가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전투였던거 같은데,
이런 거 밝혀지면 정말 재미있을듯@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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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음... to 역갤 블로그 at 5/20/2006 12:51:22 AM
오... 땡스!
태그 검색어라는 건 블로그를 분류하는 거야? 그렇다면 역사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하는게 좋을 것 같군..
아무튼 마요네즈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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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9/2006 11:13:14 PM
네이버 블링크, 미니채널 등록 완료
근데 블링크는 외부 블로거일 경우엔 링크만 가능 하고::
미니채널은 태그 검색어가 5개밖에 지정이 안된다.
수정이 가능하니깐...검색어를 뭘로 하는게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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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yonnaise to 역갤 블로그 at 5/19/2006 10:56:43 PM
마요네즈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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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9/2006 10:36:50 PM
격하가 아니라 사실을 말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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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9/2006 09:51:35 PM
오랜 만에 메모장 띄우고 풀어 봤네요.
1.
2. 1
3.
4.
5.
6.
7.
8.
9.
10. 1 (샤프의 연대인가요?)
풀어보니 아는 것이 이것 뿐....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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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룰루루 to 역갤 블로그 at 5/19/2006 09:47:35 PM
미니채널 등록 내가 해볼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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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yonnaise to 역갤 블로그 at 5/19/2006 09:41:11 PM
갸갹=인조Dymaxion.
청산리 전투로 일본인과 논쟁을 벌이다가 논파당하고
자료까지 구걸하는 추태를 벌인 장본인.
그사건으로 네이버총독부가 결성되게 한 모티브를 제공해준 장본인.
어쩌면 저렇게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뻔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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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랜스키 to 역갤 블로그 at 5/19/2006 09:16:08 PM
이글이 프런트페이지에서 사라지면(밀려나면) 답변을 하나씩 등록하도록 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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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玉蔚亞育護 to 역갤 블로그 at 5/19/2006 07:18:19 PM
나도 마지막 문장에 너무나도 깊히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나저나 독자적 연호를 쓰면 그게 황제국 아니던가? 황상도 그렇고... 굳이 그걸 격하하려는 글쓴이의 의도가 더 편협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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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룰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9/2006 05:43:42 PM
스미스중장> 나가긴 뭘 나가. 교묘하게 탈퇴를 부채질하려는 것 같은데 어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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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8/2006 11:54:46 PM
잘 읽었습니다. 상당히 신경 써서 만든 것을 보면
저거 하나당 가격이 엄청 났겠군요..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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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reiheit-토륵 to 역갤 블로그 at 5/18/2006 11:54:14 PM
아무리 이방원이 친명파가 아니라 주원장 아들내미나 공신이었다 하더래도 저당시 표전문제가 문자의 옥의 하일라이트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허리를 잘라 죽이거나 물에 던져 죽이거나 포를 떠서 죽였을 겁니다. 절대 기특한 놈이랑 관계가 없죠. 참 주원장을 보면 사람 죽이는 걸로 신하들 발발 떨게 만드는 재주는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정도. 별별 방법이 다 있더군요. 오리고기 먹으면 죽는다는 사람에게 하사품으로 오리고기를 먹여서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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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로직 to 역갤 블로그 at 5/18/2006 11:18:39 PM
토륵은 날 대화방 방장 안시켜준거 때문에 비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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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로직 to 역갤 블로그 at 5/18/2006 11:16:12 PM
朴下史湯, 충성용감단결 /
두 분 다 좋은 가르침, 잘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과 말씀으로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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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허롱 to 역갤 블로그 at 5/18/2006 10:20:57 PM
로직님 난 임시반장이였는데 안 먹고 들어간 이유 좀...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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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reiheit-토륵 to 역갤 블로그 at 5/18/2006 08:24:52 PM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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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충성용감단결 to 역갤 블로그 at 5/18/2006 12:42:40 PM
오구라 그따위 매너로 할거면 역갤 블로그에서 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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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미스중장 to 역갤 블로그 at 5/18/2006 12:38:13 PM
저는 안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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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8/2006 09:40:25 AM
원래 반장선거는 임시반장이 50%는 먹고 들어가게 되 있음 ㄲ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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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로직 to 역갤 블로그 at 5/18/2006 09:31:59 AM
1. 역시 랄라라님이 제일 나을듯-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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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朴下史湯 to 역갤 블로그 at 5/18/2006 09:25:40 AM
그다지 상관없는 얘기지만 요즘은 유전자 검사로 친자확인이 가능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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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8/2006 07:42:08 AM
아무리 그래도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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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8/2006 07:37:14 AM
서양사 조또 모르고 전쟁사 조또 몰라도 설마 10번은 풀수있겠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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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玉蔚亞育護 to 역갤 블로그 at 5/18/2006 07:32:51 AM
문헌명이 누락된 것 같습니다.
"쉐인 스미스와 매트 앤더슨씨가 참고로 한 문헌은 1409년에 쓰여진 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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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8/2006 07:30:01 AM
A-o-spades> 퍼가는 것 자체야 문제가 안됩니다. 출처만 밝힌다면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특히 이 글은 저 역시 다른 분이 입력한 논문을 퍼와서 제 생각을 적은 것이니 남이 퍼간다고 해서 뭐라할 입장은 못됩니다.
다만 퍼가려면 자신의 이름으로 퍼가야지 왜 '랄라라'라는 이름으로 올려서 마치 제가 역갤에다 올린 것처럼 했냐는 겁니다. 리플에다 역갤 블로그 광고까지 했던데 광고하는 거야 고마운 일이나 제 이름을 걸고 그러고 있으니 불쾌한 겁니다.
채팅방에서의 사칭이라면야 웃고 넘어갈 수 있으나 다른 게시판에서의 사칭은 심히 불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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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8/2006 12:22:01 AM
일본의 경우 헤이안 시대 봉건제로 전환되면서부터 기마무사들이 전쟁의 전면에 등장하였고 이때는 분명히 말타고 활을 쏘며 싸웠습니다. 무로마치 시대를 거치며 조금씩 쇠퇴하기는 하였지만 전국시대 초기.. 그러니까 무로마치 말기까지만 해도 기마무사의 전통이 유지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기원이 의심스럽지만 일본내부에서 고류를 표방하는 무예 중에는 마상창술과 마상궁술등을 가르치는 유파가 아직도 남아 있기도 합니다.
다만 일본에서 기마무사가 쇠퇴한 이유는 전국시대에 들어가면서 잦아진 전쟁으로 막대한 전비를 감당하지 못한 영주들이 점차 기마병의 양성을 축소하고 싸게 징집할수 있는 아시가루 세력들을 대신 쓰면서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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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충성용감단결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11:36:57 PM
독일의 검성인 Hans Talhoffer의 검술서적의 삽화를 보면 맨몸으로 갑옷을 입지 않고 하프 소딩을 하는 삽화가 있는데 이게 정기적으로 이야깃거리가 되는 모양입니다.
비록 서양의 도검이 일본도처럼 예리하게 날을 세우지는 않지만 맨손으로 잡다가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 텐데 저런 삽화가 말이 되느냐는 것이 이유입니다.
1000번 숫돌이나 사포로 마무리한 날의 경우 제 창에 비추어 볼때 일단 잡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만 꽉 잡거나 미끄러지면 대형사고죠. 저같은 경우와는 달리 국내의 일본도 형태의 도검 소지자들은 워낙 짚단/대나무 베기에 집착하는 형태를 보이다 보니 날을 아주 예리하게 세우고, 그러다 보니 단지 잘못 휘두른 칼을 잡는 것만으로도 손가락 4개의 인대가 절단되는 대형사고가 제법 일어나는 모양입니다.
안그래도 자주 가는 까페에서 무려 술먹고 베기하려다(-_-;;;) 칼을 삐끗 휘둘러 손으로 잡다가 정말로 손가락 인대가 모조리 나가버리는 사태가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불과 몇주전에요. 듣기로는 피바다가 되었다더군요.
따라서 갑옷을 입지 않고 하프 소딩을 재현하려면, 애초에 도검의 날을 죽이고, 가죽장갑을 착용한 후, 두꺼운 옷을 입고 하는게 낫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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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충성용감단결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11:28:39 PM
저런 검술의 경우 건틀릿을 착용해야 가능할듯
한데 갑옷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 엣지를 직접
손가락을 대면 다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갑옷을 입지 않고 하프소딩을 재현할 수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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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철중검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10:48:08 PM
다케다 기병이 하마해서 싸웠다는 건 서유럽의 하마기사같은 역할이었다고도 들었는데, 그거도 잘 모르겠네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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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朴下史湯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10:50:44 PM
사실 일본은 잘 모르지만-_-;;;일본처럼 죽어라 전쟁하던 나라에서 기병의 위력을 몰랐을 리도 없고, 당연히 쓰였습니다. 하지만 말의 특성상 본격적인 중기병/창기병은 거의 없었다고 알고 있구요. 궁기병 위주였습니다.
↓ 요부분은 완전 추정/추측입니다-_-;
임진왜란 때쯤 되면 말을 키우기가 어렵다는 점 때문에 대규모 보병전으로 완전히 전환되다시피 했습니다. 동부에선 쓰였겠죠. 하지만 다케다 기마대가 본격적인 중기병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궁시공격 위주의 경기병이었지만 급할 때에는 근접전도 수행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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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朴下史湯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10:49:01 PM
어이쿠 클릭을 잘못 했습니다-_-;
朴下史湯/ 가르침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오해한 부분도 있었네요
한 가지 더 여쭈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일본역사 얘기할 때 심심풀이격으로 나오는 게 '일본기마대'인데요, 소설 등에서는 다케다 무적 기마대...운운하지만 실제로 다른 나라처럼 무장기병들이 돌격하는 경우는 없고 무사들이 말에서 내려 보병들과 같이 보조를 맞추는 '하마전투'밖에 없었다는 것이 중론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돌격기마대는 없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의 근거는 '일본의 말은 보잘 것 없어서 돌격용으로는 못 쓴다'라거나 '산지가 대부분이라 기마대는 못 쓴다'라거나 '농경문화라 밭갈이용으로나 쓰였다'라든가 이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비슷했던 신라나 가야, 즉 산지가 많고 종자가 보잘 것 없어도 서역으로부터 수입하기에도 여의치 않았던,신라와 가야에서도 대규모 기병이 운용되었다고 하면, 이들 나라와 대단히 밀접한 관계였던 일본의 경우엔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아직도 '일본기마대'설을 주장하는 사람을 들어보면 '관서와 달리 관동에는 기마대가 있었지만 쇠퇴했다 -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끌고 온 군대도 기마대'라든가 '관동평야 부근에서는 기마대 비슷한게 있었다'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데요(혼슈 최북단의 아오모리 지방 같은 경우엔 '말'에 관련된 문화가 많이 발달되어 있더군요 기마대와는 관련이 없어보이지만요)
일본 기마대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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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허롱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10:43:22 PM
충성용감단결/ 습자지 지식으로 아는 척 하는 것뿐이라,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朴下史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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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허롱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10:31:46 PM
1. 보병이 실제로 기병과 어느 정도 대등한 싸움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상 총기류가 발명된 이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다른 시대는 모르겠는데 조선때에는 서역이나, 아니면 만주에서 말을 수입했습니다. '호마'라는 얘기가 자주 나오거든요.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keyword=%ED%98%B8%EB%A7%88
개인적으로 몽골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중국을 통해서 서역마를 들여왔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봅니다. 고구려 사신의 사마르칸트 방문이 정기적인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고구려 때 서역마를 들여왔을 수도 있겠죠.
3. 기병은 다리로만 말을 몰 수 있어야 비로소 기병입니다. 말타고 활을 쏠 수 있는데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한 손으로 창을 쥐는 정도는 할 수 있었겠죠.
4. 남방국가도 기병을 대규모로 운용했죠. 수백 기 정도가 아니라. 신라 사다함이 대가야로 몰고간 병력이 기병 5천이라고 합니다. 과장됐을 수도 있지만 - 제대로 된 평야가 없는 신라에서도 그정도의 기병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건 상당히 의외죠. 시기는 상당히 늦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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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朴下史湯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10:24:07 PM
허롱님이 제대로 알고 계시군요. 기병 자체의 효용성은 이미 남북전쟁때 조롱거리가 될 정도였지만 기병세력 그 자체는 1920년대 각국이 근대화를 시도할 때부터 서서히 사라져갔고 2차대전 당시에도 소련이 독일군의 후방 기지를 기습하는데 코사크 기병을 동원하여 큰 전과를 올리는 등 생각외로 오랫동안 사용되었습니다. 기병대 최후의 실전사례는 한국전 당시 국군 장철부중령의 기병대대의 활약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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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충성용감단결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7:52:39 PM
잘 읽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론 소화기의 등장 이후에도 기병은 계속 활용되었고 기관총의 등장과 함께 기병도 몰락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대략 남북전쟁 전후?) 사르허전투였던가...거기서도 청나라 기병이 명나라 조선군의 화기부대를 제압하지 않나요?
그리고 말씀하시는 걸 보니 중국에서는 서역마 수입해서 고만고만 기병을 활용한 것 같은데 한반도같은 경우는 어땠나요? 조선군의 경우는 3할이 기병이었고 무기도 창은 쓰기 힘들었고(사실 어느 나라든 고삐로 말을 다루면서 긴 창을 움직이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곤'정도라고 알고 있는데요 가야나 신라, 백제같은 남방국가들을 봐도 기마병 유물이 발견되었다느니 수 백명단위로 기마전을 펼치는 기사가 간혹 있는데요 여기에 대핸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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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허롱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5:54:21 PM
사학계 전체로 보면 전쟁사학은 완전 진따오타쿠히키코모리전차남의 영역아닌가?
경제사나 문화사 같은 걸로 문제내면 오구라도 깨갱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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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구라빙구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5:40:17 PM
오구라 쟨 왜저래? 역갤 블로그에 시비걸러 가입한건가?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자뻑이네.
외로운 유학생활이 힘들다고 그렇게 해소하면 곤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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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격전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5:15:02 PM
크 역시 저의 딸리는 필력이란.. 죄송합니다. 북위에 먼저 피휘하겠다고 요청하는 장수왕의 뛰어난 균형 감각에 대해서도 '왜? 한판 붙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그나저나 불펌질이라니, 요즘 못된 짓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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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o-spades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5:12:07 PM
위에서 여러분들이 너무 과도한 칭찬들을 해 주십니다만, 저 역시 다른 분의 논문을 읽고 알게된 것도 있기 때문에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대한전도와 대한지지의 독도 위치에 관한 경우가 그렇습니다. 김병렬 교수의 논문에서 알게된 얘깁니다.
나머지 부분은 제 나름대로 알아낸 것들이긴 하나, 이거야 조금만 뒤져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라 이미 다른 분들에 의해 언급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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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4:44:49 PM
제대로 쓴 글도 아닌데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은 낚시성도 상당한 글이거든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지만요.
그리고 본토의 면적이 한반도보다 조금 큰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별 차이가 없었는데도'라고 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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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4:41:08 PM
흐음. 난 이방원이 처음부터 기특한 넘 대접을 받으려고 저런 거절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방원이야 친명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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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4:34:52 PM
그렇군요.. 그래서 극소수 서역마들이 삼국시대에도 명성을 떨칠 수 있었겠군요.
적토마도 서역마란 얘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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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4:33:16 PM
玉蔚亞育護> 그럼 트라팔가여?
그리고 엉뚱한 걸로 괜히 열내지 말어. 국사 전공하는 애들 붙잡고 10번 물어봐. 몇명이나 대답하나.
그 애들 붙잡고 역사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느니 상식이 없느니 해봐야 너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여.
왜 갑자기 오바하구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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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4:24:12 PM
A-o-spades>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역갤에 내 이름으로 이 글을 퍼다나른 사람이 있군요. 펌질하려면 자기 이름으로 하던가, 심히 불쾌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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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4:22:02 PM
마지막 문장에 깊이 동감합니다. 북위에 전승한 적이 있는데도, 북위와 고구려 모두가 성기에 달했음을 인지하고, 스스로 북위에 대해 피휘하겠다고 요청해 있을 지 모르는 무력 충돌을 피하며 입지를 굳히며, 도발해 오는 백제를 혼찌검낸 탁월한 균형 감각을 가진 장수왕의 공업에 대해서도 의아하다, 대체 왜 그러니, 한판 붙지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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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o-spades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4:04:02 PM
랄라라눈화랑 갸갹횽은 둘다 틀렸지롱~ 왜 워털루전투가 당연한고야? 글고 설횽 10번문제는 역사에 대한 상식만 조금 있으면 누구나 풀수있는고야. 그거 못풀면 상식도 없다는 뜻이고 당근 역사에 대해 논할 자격도 없다는 뜻이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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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玉蔚亞育護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1:59:19 PM
서역마의 품종이나 학명은 잘 모르구요...-_-;
일단 서역마는 토종마보다 훨씬 크고 빠르고 힘셉니다. 임용한씨는 동북아시아 토종마가 작고 느려도 지구력이 세다고 서술했는데, 그건 잘 모르겠구요. 하지만 제주도 조랑말이나 몽골말 경우를 보면 전체적으로 맞는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 토종마는 서역마가 수입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없어지지 않았는데요, 서역마 수입은 전체 말 산업으로 볼 때 얼마 안 되는데다가 서역에서 수출한 말들도 훌륭한 전마는 아니었습니다. 정말 좋은 말들은 서역에서 다 썼으니까요. 그리고 동아시아는 습기가 많고 계절별 온도차가 심하고 평지는 대부분이 농지이기 때문에 서역마를 들여온다고 해도 그 기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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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朴下史湯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12:53:10 PM
글 잘읽었습니다. 여러 기록에 비추어 보면 일본은 원래 강했다고 생각됩니다. 원래 강하지 않았다면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조선과 일본이 차이가 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사농공상 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돈을 천시하고 유교 경전 외우는 일이 모든 일을 제쳐놓고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 경제력이 자라지 않을 수 밖에요. 한국 사람들 극일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만 일본이 왜 지금의 자리에 서게 된 이유를 열심히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단적인 예가 일본은 한국에 비교도 안되는 나라였다가 서양 기술을 받아들여서 갑자기 잘살게 되었다라는 착각이라고 봅니다.
글에 옥의 티가 있다면 일본의 면적에 관한 부분입니다. 일본 혼슈섬이 한반도 전체보다 약간 큽니다. 따라서 북해도를 점령하지 않았더라도 일본은 항상 조선보다 면적 상으로 큰 나라였다고 봐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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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ou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8:30:42 AM
아마 방원이 지 아들이나 공신이었다면 포를 떴을 겁니다. 하지만 20만 조선군의 압뷁 때문에 그냥 내버려둔 듯. 저당시는 문자의 옥과 호람의 옥등으로 아주 한글자 때문에 목숨이 왔다갔다 하던 시기죠. 절대 기특한 넘이랑은 상관 없을 듯. 그리고 아마도 홍무제는 검교를 통해서 조선에서의 이방원과 정도전의 알력 관계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이방원 독단이 아니라 조선의 공식입장을 정도전 대신에 표방할 수 밖에 없던 이방원을 때려죽이는게 바로 정도전이 바라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정치백단인 홍무제가 알았기 때문일 가능성도 배재 할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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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로직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8:32:52 AM
글 올려주신 분의 폭넓은 지식과 논리력에 감탄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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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ou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8:06:46 AM
방원의 저 생까는 말을 들은 홍무제는 발칙한 넘이라 생각했을까 아니면 참으로 기특한 넘이라 생각했을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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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3:41:29 AM
감탄했소. 랄햏. 덕분에 나도 확실한 개념을 잡을 수 있게 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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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3:02:21 AM
앗.. 이 글 올블로그 실시간 인기글에 올라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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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2:49:28 AM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전한이나 삼국시대에 서역의 말이 꾸준히 수입되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후 동아시아의 토종마는 어떻게 되나요? 그림이나 사진 등을 보면 여전히 군마로서 쓰였던 것 같던데요.
그리고 그 수입된 서역마와 토종마의 품종명과 차이점을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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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7/2006 02:45:37 AM
랜스키 >>> 뭔 소린겨? 생전 첨 보는 사람이 이상한 소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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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갸갹 to 역갤 블로그 at 5/16/2006 11:46:58 PM
네... NFSC의 미스트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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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음유시인 미스트 to 역갤 블로그 at 5/16/2006 10:08:46 PM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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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6/2006 10:05:37 PM
랑띠> 나도 저 코멘트보고 그런 오해를 할 것이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코멘트를 3번이나 누르는 실수를 할 리가 없잖어?
오해하지 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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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6/2006 09:59:30 PM
글쎄요. 일반 보병은 애초에 엘리트 전사인 기사의 상대가 장비면으로나 숙련도 면으로나 될 수가 없고, 똑같은 엘리트 전사를 내놓는다 해도 장비면에서 천하제일갑인 플레이트 아머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동양의 갑옷도 나름대로 틈이 있는 것이 결코 생각이 없어서 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움직여 적을 맞아 싸우는 것이 전사의 당연한 의무인 것이고 이 중에서 기후, 전투법, 군사문화등의 영향을 받아 결정되는 것이 갑옷의 형태이며 최소한 어떤 나라의 갑옷이든 외부 8방향에 대한 방어는 확실하게 상정하고 있는 만큼, 상대가 가만히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시점에서 이미 어느 무기를 든 전사가 이긴다고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어디가 유리하다 까지는 말할수 있어도, 단정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가 없게 되지요.
세상에서 흔히 나오는 특전사랑 해병대가 싸우면 누가 이겨요? 라는 질문에 정말 실전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무시하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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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충성용감단결 to 역갤 블로그 at 5/16/2006 08:59:10 PM
↑맞을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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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朴下史湯 to 역갤 블로그 at 5/16/2006 08:57:27 PM
음유시인 미스트라면 예전예전에
넷츠고 판타지 동호회에서 본 이름같은데
혹시 그 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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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음? to 역갤 블로그 at 5/16/2006 08:06:59 PM
랜스키/ 랄라라씨 멀티하지 마세요 사람이 왜 그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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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랑띠 to 역갤 블로그 at 5/16/2006 07:45:49 PM
전쟁사 모르면 역사할 자격도 없나-_-;
역사관이 심히 궁금할뿐-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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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f to 역갤 블로그 at 5/16/2006 07:45:05 PM
Anonymous> 예전에 A님의 블로그에서 뵈었던 그분인가요? 독도 문제로 다투고 계시던..
한국분인줄 알았는데 외국분인 것 같군요. 독도 문제로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은데 Anonymous의 생각을 영어로 쓰셔도 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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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6/2006 05:50:37 PM
저 역시 박하사탕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약간 태클이 되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게 상대방의 허점만을 공략할 수 있다면 무기와 갑주의 우위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는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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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6/2006 05:48:55 PM
↑실행하기가 오지게 빡시긴 하지만 말이죠-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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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朴下史湯 to 역갤 블로그 at 5/16/2006 05:01:34 PM
"이규원이 울릉도를 향해 간 때가 1882년 4월. 그 때 조선의 제26대 국왕 고종(1863 - 1907 재위)은 그에게 「송죽도(松竹島), 우산도는 울릉도의 옆에 있는데, 그 상거(相距)의 원근(遠近)이 어떠한가. 또 어떤 산물의 이득이 있는가」라고 하문하고 있다. 이 고종의 질문에 대해서 이규원은 「우산도는 곧 울릉도로, 우산(芋山)은 옛 국도(國都)의 이름」이라 하고, 「송죽도는 곧 한 개의 작은 섬으로 거리가 10리(지금의 2 Km에 상당)이고, 그곳에서 산출되는 것은 자단향과 간죽(簡竹)」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성종실록」1년 8월조에 기록된 「울릉도 옆에 작은 섬이 있다」의 작은 섬과 같이, 어느 쪽이든 "울릉도에서 동쪽으로 2 Km정도 떨어진 현재의 울릉군 울능읍 도동리 죽서도로, 지금의 독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동국여지승람」의 우산도 울릉도조에 송도(松島)·독도의 문자가 없고, 송도·죽도·우산도(芋山島) 세개의 섬을 울릉도라고 칭한 것은 「동국 문헌 비고」에 근거한 지식이었기 때문이???????????"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은 발령 후 출발 준비를 마치고 출발하면 벌목철이 지나서 일본인들이 철수해버린 다음이 되므로, 출발 예정일을 다음해로 넘겼다. 그 결과 이규원이 울릉도 현지조사를 위하여 정작 서울을 출발한 것은 1882년 음력 4월10일이었다. 이규원은 출발에 앞서 4월7일 국왕을 알현하여 하직 인사를 올렸는데, 이 자리에서 국왕은 울릉도 동쪽 20~30리 정도에 ‘우산도(독도)’가 있고, 또 ‘송죽도(松竹島)’라는 섬도 있어서 섬이 세 개라는 설도 있으니 이것도 조사해 오도록 하고, 울릉도 현지조사 때에는 사람을 이주시켜 읍(邑)을 설치할 만한 후보지를 조사해 오라고 명령하여, 울릉도 ‘재개척’ 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냈다.
.......20~30r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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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nonymous to 역갤 블로그 at 5/16/2006 12:49:46 PM
창들고 전열짜면 막을 수 있습니다. ( ′H`) y-~~
농담이고, 개개인이 상대한다하더라도 모든 무기에는 각자의 특성과 맹점이 있습니다. 투 핸드 소드가 크고 무겁고 긴 길이로 강력한 파괴력을 보장한다면, 그만큼 아무래도 둔할 수밖에 없고, 두 손으로 쓰는 무기인 이상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맹점을 파고 들어가는 것이 무기를 공략하는 방법이라는 것이지요.
딱히 무기의 특성을 들지 않더라도, 무기를 상대하는 법 중에는 상대 무기의 궤도를 보고 그 궤도의 일직선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피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내려치는데 그 앞에 있지 않고 옆으로 이동해서 무기를 피한다던가 하는 것이지요.
이런 것은 병사 개개인의 숙련도 문제이고, 그렇게 해서 공격을 피한 다음에는 단검을 빼들고 그래플링 상황으로 들어가 갑옷의 틈새로 찔러 넣던지, 안면가리개(바이저)를 열고 얼굴을 찌르던지, 아니면 스탠딩 그래플링으로 들어가 기사를 넘어트리고 처리하든지, 방법은 무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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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충성용감단결 to 역갤 블로그 at 5/16/2006 01:44:17 AM
흐음.. 다 좋은데 문장이 끊기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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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6/2006 12:56:43 AM
공작이라기 보다는 대공이 어울릴 듯 하군요.
공작 두개 중복 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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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로직 to 역갤 블로그 at 5/16/2006 12:43:35 AM
저걸로 찌르거나 내려치면 동양의 웬만한 갑주는 그대로 박살날 것 같군요.. 플레이트 아머에 저걸 가지고 공격해 들어오는 유럽의 기사를 막을만한 동양의 보병이 있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강력해 보입니다.
이상 문외한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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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6/2006 12:18:34 AM
머리 좋군요. 토해서 깊이 잠든 척 하다니...
저같은 사람은 상상하지도 못할 아이디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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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6/2006 12:16:37 AM
제가 수정했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미스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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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5/2006 11:58:57 PM
으악 영어/프랑스어/독일어로 나눠놓은게 다 망가지네
...알아서 봐요. -_-; 룰라라
난 책임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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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음유시인 미스트 to 역갤 블로그 at 5/15/2006 11:44:39 PM
玉蔚亞育護> 2번 빼고 모르겠군. 2번은 당연히 워털루 전투일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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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5/2006 11:20:28 PM
인조이에서 청산리 전투 논쟁에서 대패하여
'네이버총독부'의 결성을 유발시킨 장본인 dymaxion(=갸갹)은 수치심도 없는개벼... 저렇게 당당하게 활동하는걸 보니
당신의 ㅄ같은 뻘짓거리로 네이버총독부가 결성된 책임은 어떻게 질거야 이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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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랜스키 to 역갤 블로그 at 5/15/2006 07:39:56 PM
인조이에서 청산리 전투 논쟁에서 대패하여
'네이버총독부'의 결성을 유발시킨 장본인 dymaxion(=갸갹)은 수치심도 없는개벼... 저렇게 당당하게 활동하는걸 보니
당신 ㅄ같은 짓거리 때문에 네이버총독부가 결성된것은 어떻게 책임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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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랜스키 to 역갤 블로그 at 5/15/2006 07:38:33 PM
인조이에서 청산리 전투 논쟁에서 대패하여
'네이버총독부'의 결성을 유발시킨 장본인 dymaxion(=갸갹)은 수치심도 없는개벼... 저렇게 당당하게 활동하는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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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랜스키 to 역갤 블로그 at 5/15/2006 07:34:09 PM
http://www.geocities.com/mlovmo/page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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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nonymous to 역갤 블로그 at 5/15/2006 12:50:39 AM
아니, 그래도 10번은 문제만 잘 읽으면 맞출수 있잖아? 웰링턴 시대때 기갑사단이나 전차부대, 공수부대가 있을리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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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yhn217 to 역갤 블로그 at 5/14/2006 01:48:02 PM
소햏은 상븅신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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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갸갹 to 역갤 블로그 at 5/14/2006 11:48:36 AM
일본에서도 왜 저러한 형태가 되었는가는 미싱 링크입니다. 나라-헤이안 시대의 괘갑, 특히 오오요로이 동체와 직접적인 연결고리로 추정되는 우치가케식 괘갑이 변형되었다는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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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충성용감단결 to 역갤 블로그 at 5/14/2006 11:35:31 AM
상븅신은 좀 심한거 같아. 왜냐면 난 근현대전사는 잘 모르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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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reiheit-토륵 to 역갤 블로그 at 5/14/2006 10:41:35 AM
의도적으로 그렇게 적었습니다. 처음 적을때는 sweet home 으로 적었는데, 뭔가 개그 요소를 넣기 위해.
(라고 말하면 답변이 될려나. 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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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reiheit-토륵 to 역갤 블로그 at 5/14/2006 10:40:35 AM
어디까지나 아손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기도 하고.. 당시 서양인이 동양인을 보는 일반적인 시각과 그 후의 심경을 비교해서 볼 수 있게 해주는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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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kaudekd to 역갤 블로그 at 5/14/2006 09:59:37 AM
Sweet house라는 표현은 들어본 적 없는데. 보통 sweet home이라고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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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ma to 역갤 블로그 at 5/14/2006 09:33:29 AM
횽들 딴건 몰라도 마지막 10번은 맞추겠지? 10번 못맞추면 진짜 븅신중에 상븅신인고야-_-+++ 그리고 토륵횽은 두개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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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玉蔚亞育護 to 역갤 블로그 at 5/14/2006 09:09:27 AM
흠...
광개토대왕비의 조작설이 최근 중국측의 연구로 인하여 부정되는 것이 대세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로 인하여 왜 임나일본부설이 다시 부각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너무 비약이 심하지 않나요?
그건 일종의 논리적 결벽증인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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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갸갹 to 역갤 블로그 at 5/14/2006 01:13:49 AM
2. 2번 5. 4번 7. 4번 9. 2번
우웃 빡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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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reiheit-토륵 to 역갤 블로그 at 5/14/2006 01:08:28 AM
2. 2번 5. 4번 7. 1번 9. 2번
우웃 빡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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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reiheit-토륵 to 역갤 블로그 at 5/14/2006 01:06:44 AM
야~ 어렵네요.
저는 2번 문제에 답이 2번인거 같구..
7번 문제 답이 1번인것 같다는 거 이외에 다른 문제는 감도 안잡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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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갸갹 to 역갤 블로그 at 5/14/2006 01:02:47 AM
랄라라씨 안녕하세요?
역갤 블로그란 곳에 처음 와서 구경중인데 재미있네요.
이 본문 내용도 재미있는 내용이기는 한데, 역시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어 안타깝습니다.
왜냐면 프랑스에서 기차가 처음 도입되었을때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거든요.
유럽에서조차 그랬는데, 조선에서 그랬다고 해서 대단한 특이현상인 것 처럼 규정지을 필요는 없다는 거죠.
산업혁명 당시에 방직기 같은게 나왔을때도 영국에선 직물 노동자들이 기계를 때려 부수기도 했고..
증기기관 선박이 처음 발명되었을때도 굉장한 반발이 있었어요.
이런 것들을 함께 감안해서 당시의 사회 변화를 총체적으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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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갸갹 to 역갤 블로그 at 5/14/2006 12:50:52 AM
또한 4세기 이전 보이던 김해지역 대규모 고분들이 5세기를 넘어 축소화, 혹은 사라졌다고 볼수 있으니 이는 임나의 사실상 몰락이 아닌가 생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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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돈데기리 to 역갤 블로그 at 5/13/2006 11:40:26 PM
그렇다면 일본서기에 의하면 가야연맹중 왜연맹에 붙은 자들이 점점 늘어난 것으로 보이는데, 해양주류세력에서 대륙지향세력으로 맹주자리가 옮겨간 상황을 보면 아마 가야쪽이 400CE 년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보여준 왜의 조금 실망스런 전투력을 보고 친왜 맹주에게서부터 떨어져나가 조금씩 자리를 옮긴 것으로 소햏은 추측하는데, 대가야가 왜에 의지하는건 어떤 이득이 있을지 궁금하옿.
혹 신라가 백제와 화친을 맻으니 결국 왜를 찾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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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돈데기리 to 역갤 블로그 at 5/13/2006 11:06:46 PM
랄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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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춘천반달웅 to 역갤 블로그 at 5/13/2006 08:04:12 PM
랄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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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춘천반달웅 to 역갤 블로그 at 5/13/2006 08:04:12 PM
'해' 자가 영 다르게 보이네....
같은 탁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랄라라는 일빠구만.... 참 위험한 자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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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lskrkek to 역갤 블로그 at 5/13/2006 05:29:31 PM
이런 글들이 항상 가지고 있는 맹점은 갑옷을 화려하게 바꾸게 되었다만 설명할 뿐, 왜 화려한 모습이 그런것이 되었는가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분명히 역사적인 연원이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한 무장이 과거 열도에 전해내려오는 전통을 따랐다거나 뭐 그런것 말입니다. 아무튼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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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나가다가 to 역갤 블로그 at 5/13/2006 04:59:44 PM
랄라라씨의 블로그 글들 즐겨 보고 있습니다.
많이 배운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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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K to 역갤 블로그 at 5/13/2006 06:57:27 AM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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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3/2006 06:45:24 AM
돈데기리> 임나, 즉 김해가 섬이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삼국사기 파사이사금 8년의 '남쪽은 가야와 접하고 있다(南接加耶)'는 기록이나 일본서기 흠명 2년의 '임나는 신라와 지경이 접해있다(任那境接新羅)'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그 북쪽에 있다는 바다가 그리 크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지마이사금 4년에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황산하(黃山河)를 건넜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에도 황산강(黃山江)이 가야의 동쪽 경계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마도 이 황산하가 북쪽에 있다는 바다가 아닐까 합니다. 당시 해수면이 상승했다 하니 김해의 북쪽과 동쪽을 감아 흐르는 낙동강 하류의 수위도 상승하거나 하여 이를 바다로 표현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강을 바다로 표기한 경우는 다른 경우에도 종종 보이기 때문에(가령 한강을 바다로 표기한다던가) 무리한 생각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흠명23년의 가라국이 대가얍니다.
tkaudekd> 당시 한반도 남부의 지형을 재현한 지도 자료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김해에 대해선
윤선·이언재, 수가리패총(水佳里貝塚)의 연체동물화석군집과 해수면변동, 고생물학회지 1(1985)
를 참고하시면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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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3/2006 06:44:15 AM
삼천포지만 전차電車는 운행 일주일만에 어린아이를 치여 죽인 사고 후 도끼를 든 군중들에게 습격당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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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oo to 역갤 블로그 at 5/12/2006 07:42:51 PM
아~ 디케이님 일깨워줘서 당케! 아손씨 오해해서 미안 그렇다해도 저런 시선은 좋지 않다규 -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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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ㄷㄷ to 역갤 블로그 at 5/12/2006 04:49:51 PM
랄이도 가끔 국빠질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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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ㅡ,.ㅡ to 역갤 블로그 at 5/12/2006 04:11:54 PM
역시나 간학문적인 연구가 중요한거 같군요 ;
그 당시 한반도 남부 쪽 지형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연구해서 재현해놓은 지도 자료 같은게 혹 있나요? 사고에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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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kaudekd to 역갤 블로그 at 5/12/2006 12:07:23 PM
역시나 간학문적인 연구가 중요한거 같군요 ;
그 당시 한반도 남부 쪽 지형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연구해서 재현해놓은 지도 자료 같은게 혹 있나요? 사고에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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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kaudekd to 역갤 블로그 at 5/12/2006 12:06:12 PM
슬픈 코미디군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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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wultong to 역갤 블로그 at 5/12/2006 11:29:32 AM
ㄷㄷ // 랄라라씨의 이 글을 읽어 보슈.
http://ralrara.blogspot.com/2006/03/100.html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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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K to 역갤 블로그 at 5/12/2006 10:27:36 AM
글 내용만으로는 충분히 오해할만한 데, 거기에 대해 찬찬히 설명을 해줘야지, 랄랄라씨이게 발광한 것도 아닌 데, 발광이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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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K to 역갤 블로그 at 5/12/2006 10:24:39 AM
오호 새로운것을 배우는구려.
-지리학에 관계가 깊지만-그점에 대해 궁금한게 있는데,
그럼 임나가라로 추정돼는 김해평야가 경상남도랑 분리됀채 아예 하나의 섬으로 분리됀거라 볼수 있는거요?
그리고 경상남도 지도를 보니 고구려군이 공격한 가야 성들이 신라와 꽤나 가까운데다 서야벌 서남에 위치하고, 결정적으로 김해부근이 완벽한 섬이였다면 가야가 아직 단단한 연맹체를 이루지 못한 가운데 해상적으로 우호도가 깊은 왜 연맹에 가입할 수 있다고 생각할수 있겠구려.
일단 김해만 놓고 본다면 일본 극우애들이 주장하던 임나일본부와 비교해 조금 작은 스케일인데, 금관가야가 4세기 말경에 이르러 가야연맹의 맹주역을 일임하던것은 사실이나 이는 왜인이 임나일본부를 세운지 40여년 만에 작살이 난 바이고 그후 대가야가 맹주로 떠오른 것을 보아 무언가 힘의 추축이 뒤흔들렸다는걸 짐작할수 있솧.
게다가 주신 링크에 보니 6세기경 대가야 군주만 왕 호칭을 쓸수 있었다 하나 아라가야까지 왕 호칭을 쓴것을 보아 가야연맹에 큰 분열이 일어난듯 싶고, 이때 혹 친왜파가 새로운 연맹으로 갈라져 나온것이 아닌지 의심돼오.
혹시 대가야도 흠명조 기사에서 임나에 포함돼는지 궁금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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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돈데기리 to 역갤 블로그 at 5/12/2006 09:42:57 AM
원래 왜국에서 신라를 공격하려면 남쪽 아니면 동쪽 루트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일본서기에서도 본진은 일본 열도에서 파견하여 현지 군세와 합류하기 때문에 바다를 건넜다고 해서 임나일본부가 없었다고 하기는 힘듭니다.
물론 동쪽 변경만 침범한다면 이는 의심할만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남쪽의 육지 거점을 놔두고 동쪽 해상으로만 침범한다면 이건 불필요한 우회공격이 되겠지요.
그러나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시기에 해당되는 신라본기의 왜 관련 기사를 보면 동쪽 해상으로만 침범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실성이사금 6년의 기사를 보면 남쪽 변경을 침범하고 있고, 7년엔 말씀하신 대마도 병영 기사가 나오고 있고, 눌지 마립간 24년엔 남쪽 변경을 침입하고 있고, 자비마립간 20년에는 왜군이 다섯 방면의 길로 침입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금성, 명활성 포위가 빈번하고, 그냥 변경을 침입했다는 기사도 많기 때문에, 반드시 왜군이 수고스럽게 동해를 건너 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대마도가 임나가 아니냐고 질문하셨는데, 우선 국내측 기록을 봐도 대마도는 임나가 될 수 없습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임나왕족이라는 진경대사는 김유신의 먼 후손이라 고 기록되어 있는데, 김유신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금관가야 사람입니다. 따라서 '임나=금관가야'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금관가야는 삼국사기 잡지에 의하면 김해라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김해는 7세기전까지 각지에 바닷물이 들어온 상태입니다. 그래서 각지에 패총과 어로 도구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숭신 65년에 임나의 북쪽이 바다로 막혀있다(北阻海)라고 나와있다고 해서 이걸 대마도에만 해당하는 걸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위에서도 말했지만, 임나는 초기에는 금관가야 하나를 지칭하다, 후기엔 가야 연맹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게 합리적입니다. 말씀하신 흠명23년(562)조엔 가라국 안라국 사이기국 다라국 등 10국을 통틀어서 임라라 한다고 나오지만, 그 이전인 흠명5년조에는 임나국이 안라국을 형으로 삼는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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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2/2006 08:23:14 AM
발광은 책을 읽은 후에 해도 늦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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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2/2006 08:23:28 AM
소햏 뜻은 신라본기에 출몰하는 왜군이 대부분 동쪽, 남쪽, 즉 서야벌 해안가에서부터 출몰하기 때문에 이는 간접적으로 바다를 건너오는것 (아니면 전략상 전혀 불필요하게 우회공격을 하거나)을 암시한다 생각하오.
고로, 소햏 생각엔 랄라라햏이 일본서기에서 임나에서 합류해 신라를 공격하였다는 말은 혹 대마도를 이야기하는게 아닌가 생각하오.
역사적으로 대마도는 일본쪽에서 한반도를 침공하기 위한 보급기지와 다름없었고 또한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섬이니..
일본서기 숭신천황기 65년조에 임나가 조공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여기에 임나의 위치를 설명하길 축자국 2천리에 있으며 북은 바다로 막히고 계림의 서남에 있다는 기사가 있다고 하는데, 확인 부탁드리오.
게다가 흠명천황 23년조엔 신라가 임나를 쳐 없앴다 하였으나, 본래 임나는 10여소국이라 하는데 이것엔 가라국과 안라국도 포함되어 있으니, 혹 임나가 한반도 남해안 연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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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돈데기리 to 역갤 블로그 at 5/12/2006 04:51:39 AM
놀고 있네 애가 맞는걸 보고 가장 웃음이 나는 장면이라느니 문명의 충격앞에 놀라는 건 인지상정이거늘 사람이 맞는거 보고 아둔하게 행동할때 때려주는것만큼 속시원한 일은 없다니 이 인간이 오래 살았다면 틀림없이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도 앞장섰을 거 같은 포스를 팔팔 날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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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ㄷㄷ to 역갤 블로그 at 5/12/2006 03:20:53 AM
davidrumsey.com/japan
1877 Mori Kinseki
Japanese map.
Left upper side map of Korea.
Jukdo and Songdo part of Chosun
Jukdo and Songdo green color.
Frogmouth love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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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o 역갤 블로그 at 5/12/2006 02:45:12 AM
이사부가 신라 사신의 계급이 낮다는 이유로 왜 사신이 머물던 곳을 작살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일본서기에서 굳이 비슷한 기록을 찾자면 흠명 22년의 이야기가 비슷하긴 한데, 이사부라던가 작살을 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처음에 신라의 구례질 급벌간(級伐干)이 갔다가 대접이 시원찮아 그냥 돌아갔다는 이야기와, 이후 노지 대사(大舍)가 다시 갔는데 백제보다 서열이 낮아 역시 그녕 신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경우 진흥왕 때가 아니더라도 왜국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저항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한 때 항복하더라도 이후로도 계속해서 왜국에 저항하는 행동을 보이기 때문에 일본서기에서도 신라에 대해서만은 특별한 적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사흔이 왜국에 인질로 끌려간 시기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삼국유사는 내물왕 36년으로 나오는데 비해 일본서기는 중애9년으로 나오고, 이 경우 중간에 왜국과 싸웠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또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봐도 왜군이 쳐들어온 경우이지, 신라가 쳐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또한 삼국사기는 왜인에 대해 별도의 분류를 하지 않고 있고, 가야와 왜인에 대해서도 분명히 따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열도 왜와 반도 왜는 다른 종류라거나, 삼국사기의 왜는 가야라는 등의 주장은 근거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도 본진은 일본 본토에서 출발하여 임나에 도착하여 그곳의 병사들과 협공하거나 하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왔다는 일부 기록을 가지고 임나일본부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왜인이 쳐들어 왔다는 기록에 언제나 바다를 건너왔다는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오히려 병선을 타고 왔다거나 하는 기록은 왜의 침입 기사 중에 일부인 걸로 기억합니다), 이걸 가지고 배타고 왔으니 임나일본부는 없었다고 하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죄송해 하실 필요 없습니다. 뭘 이런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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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1/2006 10:36:24 PM
흑인의 지위가 장기간 상승하지 않은 원인을 풍부한 이민공급으로 꼽는 학설이 있습니다.
실제로 대공황이후 이민이 급감하자 이민이 다시 증가하기 시작한 1965년경까지 흑인의 지위가 빠르게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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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음 to 역갤 블로그 at 5/11/2006 04:35:31 PM
아참, 지금 밝히건대 소햏은 소위 '백제 용병설' 을 믿지 않는다오. 다만 그당시 빈번했던 국가간 "지원요청"은 믿는 바오. 왜국도 때깔은 30소국이 뭉쳐 강국을 만든 엄연한 국가이니..
하지만 (가장 왜에게 괴롭힘을 받은) 신라본기를 보면 약간 의문이 생기오.
실성이사금 원년에 미사흔을 인질로 보내니, 이건 분명 왜와 어떠한 저자세 외교관계를 맻은 자세라 할수 있겠소.
다만 다음 4년, 6년에 왜가 되려 신라를 침범하고 7년 2월에 이사금이 왜 공격을 검토할때 대마도에 그 군영을 두었다는것은 이 왜와 저 왜의 세력권이 혹 다른것인지...
혹 왜내 소국이 자체적으로 군사활동이 가능한지 궁금하옿.
게다 육지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배를 타고 서야벌 남부와 동부만 공격한 점은 참으로 특이한 점이오. 가야가 왜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면 오히려 서와 북으로 침범하는게 논리적이라 생각하옿.
게다가 보급대,전투대가 구분돼어 높은 전투력을 구사할수 있는 정규군이라면 수로로 곧장 공격하기보단 육로를 거쳐 천천히 도모하는게 더욱 더 안전한 방법이기도 하고.
...궁금한걸 쓰고보니 시비조구려. 언짢으시면 죄송하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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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돈데기리 to 역갤 블로그 at 5/11/2006 07:56:04 AM
한번 의문점을 제시한 걸로 거 아프게 때리십니다그려.
그런데 요즈음엔 계림국 내 고구려군 주둔설이 그럴듯한 설로 인정받고 있다던데, 그럼 백제인의 "신라와 고구려가 연합.." 어쩌구는 그것을 빗대어 말한것으로 볼수 있겠구려.
소햏이 호태왕비와 순라병 수참을 언급한건 그건 신라는 이미 고구려군이 나라 안에 주둔할 정도로 압도적인 저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그 상황에 신라가 -고구려에서 인질을 빼내고- 왜에서부터도 인질을 빼낸것이라. 이는 혹 신라가 고구려에게서 다시 자주성을 되찾음과 동시에 고구려의 힘을 빌어 대왜 저자세를 완고히 뿌리치려 했다 생각도 돼오.
이런 것을 "춤도 추고 떡도 치고" 라 비유할수 있을지.
얼핏 들은 일본서기에서 진흥왕대 가야공격에 대한 반응이 마음에 걸리는데, 이에 따르면 왜 사신이 가야와 신라는 서로에 대한 공격을 멈추라 하고, 사신을 보내라 일렀고, 신라 사신의 계급이 낮다하여 이사부가 오히려 왜 사신이 머물던 곳을 작살냈다는 기사가 있다 하옿.
이는 적어도 진흥왕대부턴 신라가 대왜 저자세를 버린 것으로 생각되는데, 랄라라햏의 의견 부탁드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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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돈데기리 to 역갤 블로그 at 5/11/2006 07:37:50 AM
이 자료에 대한 설명도 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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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0/2006 11:41:30 PM
돈데기리> 그 시대의 반도계 유물 가운데,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에 비견될 유물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어느 기록에 '신라 백제가 왜국을 지배했다'는 말이 있길래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당시 일본측 자료는 도래인, 특히 공인에 대해서 포로, 천민 취급하고 있습니다. 가령 이시가미 신궁의 도검명에는 도래인 제작자를 俘囚臣이라 지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俘囚는 포로라는 뜻이며, 臣은 말 그대로 신하란 뜻입니다. 간혹 도래계가 활약한 경우도 보이나, 어디까지나 왜국의 충실한 신하로서 왜인이 되어 활약한 것일뿐입니다. 어디에도 백제 신라가 왜국을 지배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백제왕릉보다 더 큰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에 비견될만한 그 당시의 반도계 유물은 일본에 없습니다.
그리고 고구려군이 왜인 순라병을 잡아 죽였다고 해서 변하는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순라병을 죽였을 뿐이지, 완전히 몰아냈다거나 거점을 파괴했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호태왕비에도 나와 있는 사항이라 하셨는데,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임라가라 종발성 추격 기사는 10년 기사인데, 서기 400년입니다. 삼국사기 박제상전에는 실성왕 원년(402)에 왜국과 화친하여 인질을 보내고, 11년(412)에 고구려에게 인질을 보내는 걸로 나옵니다.
왜국의 인질이었던 미사흔은 418년에야 박제상에 의해 구출되어 돌아옵니다. 이 때 왜국왕이 박제상을 믿게되었던 이유가 첫째, 박제상 가족이 모두 옥에 갇혔다는 것이고 둘째가 '신라가 고구려와 더불어 왜국을 치려고 한다'는 백제인의 말대로 신라 주변에서 순라 돌던 왜군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서기 400년보다 훨씬 뒤의 이야기입니다.
한반도 남부의 왜인을 그저 일시적인 존재로 보려는 생각 때문에 이런 실수를 하게 되는 건 아닙니까? 말씀하신대로 호태왕비에도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고 있는 왜군의 존재가 언급되며, 이후로도 삼국사기 열전에는 분명히 신라 주변에서 순라를 돌고 있는 왜군의 존재가 언급됩니다. '신라가 고구려와 더불어 왜국을 치려고 한다'는 백제인의 말을 듣고 왜왕이 순라병을 돌리는 과정에서, 어디에도 가야를 점령한 뒤 신라 주변에서 순라를 돌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 말은 이미 그쪽에 군사 거점을 마련했다는 것으로밖에 설명이 안됩니다.
참고로 호태왕비에는 10년 추격 기사 후에도 14년 갑진에 왜군이 백제와 연합해서 대방에 침입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체가 백제가 아니라 倭라는 걸 주목해서 보시길 바랍니다. 백제의 용병설 같은 소리가 왜 신빙성이 없는지는 이것만 봐도 아실 수 있을테니깐 말입니다.
그리고 임나와 가라에 대해서 질문해 주셨는데요, 혹시라도 임나가 가야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면 생각을 바꾸시는 게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진경대사 비문에는 분명히 임나왕족인 진경대사는 김유신의 후손이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왕족입니다. 따라서 임나가 가야가 아니라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남제서 등의 기록에 나오는 임나와 가라는, 임나는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금관가야를, 가라는 나머지 가야 연맹국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고구려가 큐슈까지 달려가서 왜군을 박살냈다는 것은 환단고기와 대배달민족사에 나오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건 언급할 가치가 없으므로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killax> 예. 본문에서 언급한 대로 요미우리의 기사는 4월달에 작성된 겁니다.
tkdyskfk> 파문이라 할 것 없어. 탁본마다 조금씩 다 다르니까. 쌍구가묵본이니 묵수곽전본이니 하는 걸로 뭘 더 바래. 인간이 언제부터 복사기가 되었다고.
주운태본도 다르니 그럼 그것도 가짜라고 하던가.
일본군 발견 이전의 탁본조차 신묘년 기사가 그렇게 나왔다면, 일본군이 날조했다는 주장은 파탄난 거지 뭔 발악이 이리 많은지 모르겠어.
이진희의 날조 주장은 이미 예전부터 끝난 걸로 받아들이는게 상식 아니었나? 언제부터 유통기한 끝난 주장, 그것도 처음부터 사상누각이라 불렸던 주장을 의지하며 발광할텐가?
적당히 해라 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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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0/2006 11:36:04 PM
광개토대왕비 고무찰흙으로 밝혀져... 파문.
탁본 뜰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글씨는 당연...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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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kdyskfk to 역갤 블로그 at 5/10/2006 07:07:50 PM
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n=200511020052 <- 작년 11월에 동아일보에 실렸던 관련기사입니다.
1881년에 제작되었다는 판본은 작년에 공개된것인데 요미우리나 iMBC에는 이제 실린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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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llax to 역갤 블로그 at 5/10/2006 03:36:36 PM
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n=200511020052 <- 작년 11월에 동아일보에 실렸던 관련기사입니다.
1881년에 제작되었다는 판본은 작년에 공개된것인데 요미우리나 iMBC에는 이제 실린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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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llax to 역갤 블로그 at 5/10/2006 03:36:20 PM
아무래도...
랄라라횽은 오마이뉴스같은데 역사칼럼을
하나써도 되겠다.
무서워서..덜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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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yonnaise to 역갤 블로그 at 5/10/2006 12:14:38 PM
설마 누구 주장처럼 고구려가 규슈섬까지 달려가 개작살내 그제야 한반도 영향이 미친것은 아닐테고...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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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돈데기리 to 역갤 블로그 at 5/10/2006 07:04:54 AM
낚여서 요즈음 역갤에도 올라온듯한 글 다시한번 읽고 갑니다그려.
물론 임나일본부의 가능성은 소햏도 어느정도 열어두고 있는 상황이지만, 한반도에서 왜계 유물이 나오고, 또한 일본에서 한반도계 유물이 나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구려.
애초에 임나일본부는 임나 지방에 왜부를 세웠다는 것인데, 이는 왜가 남해안의 제해권을 쥐고 있다는 논리가 성립돼며, 오히려 일본에서 출토됀 한반도 양식이 기원이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일이 일어날수 있는데, 한반도계 유물 년도측정이 대부분 5~6세기쯤인것을 보면 이건 아닌듯 싶소.
또한 위에 박제상전 중 순라정찰을 보내었다는 기사를 근거로 삼으시는데, 그 후에 고구려병이 왜병을 잡아 죽여 왜왕이 백제인의 말을 옳게 여겼다는건 어떤 심보(-_-)로 빼셨는지 모르겠습니다그려.
이 일은 호태왕비에도 언급돼는 상황이며, 열전에서 순라정찰은 소햏이 한문에 약한 관계로 뭐라하면 까일 정도이나, 논리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왜왕이 백제인(투항인이라 하나 소햏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전지태자와 같이 왜에 건너간 사람-혹 전지태자? 절대 이럴리 없지만 質자를 인질이란 뜻 대신 보좌관으로 생각하면 왜왕의 행동이 그럴듯해 보이오)의 말을 옳게 여겨 화근이 돼기 전에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한 것으로 보이는 것을 뒤집어서 기록한듯 싶으오.
물론 고구려는 신라를 구원해 속맹으로 삼았겠고.
호태왕비를 살짝 엿보자면 박제상열전에 기록됀 이것은 엄청난 규모의 출병으로 기록하옿.
*물론 소햏의 생각이지만 백제인의 주장으로 왜왕이 군졸을 일으켰다는 것은 왜의 신라공격은 고구려의 압박을 덜어내기 위한 백제왕의 사주가 아니였다 생각되오.
결국 임나일본부의 관건은 아직 미슷헤리인 가야에 달려있는데, 가야측 기록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니 이야말로 캐안습이라 할수 있겠소.
뭐 이것저것 쓴다는게 주저리주저리가 돼버리니 원-_-;;
P.S: 수나라? 의 왜왕 책봉시 임나와 가라를 중복기록했는데,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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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돈데기리 to 역갤 블로그 at 5/10/2006 07:03:10 AM
참고로 위에서 획의 모양이 같다고 한 것은, 서체가 같다는 말입니다. 크기와 위치뿐만 아니라 획의 모양이 다르다고 하신 분이 계셔서,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식으로 말도 안되는 날조론을 또 펼친다면, 앞으로 사카와본 외의 다른 탁본들도 모두 날조라고 하거나, 아니면 다른 탁본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날조라고 해야될 겁니다. 탁본마다 글자 크기나 위치가 조금씩 다르니까 말입니다.
호태왕비가 완전 평명도 아니고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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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0/2006 02:13:56 AM
두 탁본은 제작된 시기가 다르니 당연히 다른 겁니다. 뭔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호태왕비문은 탁본마다 조금씩 글자 모양이 다릅니다. 원석 탁본이든 석회를 바른 뒤의 탁본이든, 호태왕비문의 표면이 워낙 울퉁불퉁해서 똑같이 찍힐 수가 없습니다.
저 서건신 교수가 발표한 탁본은 일본군이 발견하기 이전의 것이라서 중요한 겁니다. 신묘년 부분이 똑같으니 말입니다. 즉 사카와와 일본군이 조작했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삼수변이 종선 바깥에 나갔다고 해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海를 每로 바꿔서 해석해봐야, 왜가 매번 신라 백제를 파했다고 밖에 해석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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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0/2006 01:52:30 AM
그게 사실이라면...
근데, 왜 고구려가 자신들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던때
자기 나라를 뽐내는 글을 쓰면서
왜가 세력을 떨치는 것을 기록했을까요?
그리고 삼국의 사서가 공통된 얘기를 하고 있다.
일본쪽의 얘기라면 '일본서기'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일본서기는 일본학자들까지도 과장과 허구로 인행 진위성을 의심하는 것이고, 중국의 사서에 관해서는 애왕 책봉기사를 말씀하시는 거 같고, 그것도 정확한 근거는 아니고, 우리나라 사서 어디에 그런 내용이 실렸다는 거죠? 제가 알기로는 없는데...
그리고, 왜계 유물이라는 것은, 일본과의 교류를 말하는것입니다. 일본 지배의 흔적이 되려면, 일본식의 건축물이나 무덤 등 들이 발견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요즘 일본 학계내에서도,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 부정하는 기류가 큰걸로 아는데, 제 생각으로는 좀 안타까운 의견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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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如水 to 역갤 블로그 at 5/09/2006 10:28:56 PM
저 두 탁본이 똑같다고 보는 랄라라님!
제가 좋은 안과 추천해 드릴테니 라식 수술 받던지 안경 쓰세요...간격도 틀리고 맨처음 바다 해자 획을 봐도 초딩도 알겠군요...쯔쯧...공부 좀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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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카리수마정 to 역갤 블로그 at 5/10/2006 01:49:18 AM
───────────────────────
근데, 왜 고구려가 자신들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던 때 자기 나라를 뽐내는 글을 쓰면서 왜가 세력을 떨치는 것을 기록했을까요?
───────────────────────
비교대상이 있어야 뽐낼 것 아닙니까. 호태왕비를 보면 고구려의 주적은 백제가 아니라 왜국입니다. 이것은 신묘년 외의 부분을 봐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안타까운 의견을 낸다고 하셨으니, 원문 정도는 해석할 실력이 있으시리라 믿고, 해석은 따로 기재하지 않겠습니다. 설마 원사료조차 읽지 못하면서 그런 주장을 하진 않으셨겠지요?)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住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 鹽城, 倭寇大潰, 城內十九, 盡拒隨倭, 安羅人戍兵. 殘倭潰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 ?連船???, 王躬率住討,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四方合戰, 斬煞蕩盡.
위는 신묘년 외의 왜국과의 전쟁 기록입니다. 백제, 신라와의 관계보다 훨씬 더 많은 기록입니다. 이 모든 것도 조작이라 하실 겁니까? 신묘년 기사를 일본측의 주장대로 해석하지 않으면, 어째서 왜국과 통한 것이 고구려의 노객이 되겠다는 맹세를 어긴 것이 되는지 문맥적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
일본쪽의 얘기라면 '일본서기'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일본서기는 일본학자들까지도 과장과 허구로 인행 진위성을 의심하는 것이고,
───────────────────────
일본서기의 상당 부분이 미화되고 초기 연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없는 사실을 완전히 새로 만들어낼 정도의 완벽한 날조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정확도가 삼국사기보다 뛰어난 경우가 이미 몇차례 증명되었습니다.
무령왕의 출생연도와 이름은 무령왕릉이 발굴되어 일본서기가 삼국사기보다 정확한 것으로 증명되었고, 무령왕이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 역시 삼촌인 삼근왕보다 출생이 빨라지고 아버지인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게 되는 문제가 발견되어 이기동에 의해 부정, 일본서기가 정확함이 드러났습니다.
또한 삼국사기 잡지에 실린 우륵의 12곡의 이름이 가야의 지명이라는 것은, 일본서기가 없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최근 함안에서 발견된 대형 건물터도 국내의 일부 학자들은 일본서기에 언급된 고당회의 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박제상의 인질 구출 사건이나, 석우로의 죽음 등이 일본서기에도 기록되어 있어, 삼국사기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일본서기가 삼국사기보다 먼저 만들어진 책이란 걸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또한 교과서에서 강조되고 있는 왕인 박사의 문화 전파 등의 기사는 모두 일본서기에서 나오는 것이지, 삼국사기에는 단 한마디도 언급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리한 기록은 그대로 전재하면서, 불리한 기록은 왜곡 날조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열한 태도는 버려야 됩니다.
───────────────────────
중국의 사서에 관해서는 애왕 책봉기사를 말씀하시는 거 같고, 그것도 정확한 근거는 아니고, 우리나라 사서 어디에 그런 내용이 실렸다는 거죠? 제가 알기로는 없는데...
───────────────────────
여수님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먼저 삼국사기에 실린 신라 백제와 왜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사를 봅시다.
元年三月, 與倭國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爲質. (實聖尼師今)
百濟人前入倭, 讒言新羅與高句麗謀侵王國, 倭遂遣兵邏戍新羅境外. (朴堤上)
六年夏五月,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爲質. (阿莘王)
迎古王子扶餘豐,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 (義慈王二十年)
신라 백제 모두가 왜국에 인질을 보내고 있고, 왜국은 신라 국경 밖에서 왜군을 보내어 순라를 돌리고 있습니다. 또한 신라는 왜국의 수차례 침입을 받고, 백제는 왜국에 가있던 인질이 왜왕에게 애걸복걸하여 백제에 돌아와서 왕이 됩니다.
문제는 반대의 경우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왜국이 신라 백제에 인질을 보낸 경우가 한 번도 없고, 애걸복걸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를 읽은 분이라면 없다는 말씀을 하실 수 없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보입니다. 왜국과 가야의 관계를 고래와 작은 물고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중국 사서의 애왕 책봉기사는 왜국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니, 애왕이 왜 나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발해의 애왕이 이 문제와 무슨 상관입니까? 허세를 부리려 엉뚱한 소리를 하시면 안됩니다. 중국 사서의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입니다.
元嘉二年, 倭國遣使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宋書,南齊書)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多珍物幷敬仰之恒通使往來(隨書)
송서의 기록이야 왜국의 자칭이니 허풍이라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서의 기록은 왜국의 자칭도 아니기 때문에 그냥 넘길 수가 없습니다.
정리하면, 삼국사기, 삼국유사, 송서, 남제서, 수서 등, 한반도와 중국의 사서가 당시 백제 신라와 왜국의 관계를 똑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대국으로 보았고, 인질을 보냈다고 말입니다. 게다가 삼국사기에는 왜군이 신라국경밖에서 순라를 돌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때는 가야 멸망전입니다.
도대체 뭘 읽으신지 궁금하군요.
───────────────────────
그리고, 왜계 유물이라는 것은, 일본과의 교류를 말하는것입니다. 일본 지배의 흔적이 되려면, 일본식의 건축물이나 무덤 등 들이 발견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
이미 발견되고 있습니다만? 전방후원분이라는 이야기 못들어보셨는지요? 하니와라는 말 못들어보셨는지요?
이런 상식조차 모르면서 안타깝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심히 주제파악이 결여된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세를 부리면 자신만 파탄납니다.
───────────────────────
요즘 일본 학계내에서도,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 부정하는 기류가 큰걸로 아는데, 제 생각으로는 좀 안타까운 의견이시네요
───────────────────────
부정이 아니라, 근거 부족으로 보류중입니다. 어디서 주워들은 걸로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임나일본부 보류는 재야가 식민사학자라고 그렇게도 욕하는 쓰다 소키치 등에 의해 시작된 것입니다.
삼국사기조차 읽지 않았으면서 아는 척을 하며 허세를 부리는 분들이 계시는데, 조용히 계시는게 망신 당하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코멘트에 반론을 하고 싶다면, 먼저 위에서 제시한 사료 원문들의 해석문을 제시한 뒤에 하기 바랍니다. 그런 뒤에도 우리나라 자료에 그런 내용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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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0/2006 12:31:3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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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고구려가 자신들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던 때 자기 나라를 뽐내는 글을 쓰면서 왜가 세력을 떨치는 것을 기록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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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대상이 있어야 뽐낼 것 아닙니까. 호태왕비를 보면 고구려의 주적은 백제가 아니라 왜국입니다. 이것은 신묘년 외의 부분을 봐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안타까운 의견을 낸다고 하셨으니, 원문 정도는 해석할 실력이 있으시리라 믿고, 해석은 따로 기재하지 않겠습니다. 설마 원사료조차 읽지 못하면서 그런 주장을 하진 않으셨겠지요?)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住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 鹽城, 倭寇大潰, 城內十九, 盡拒隨倭, 安羅人戍兵. 殘倭潰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 ?連船???, 王躬率住討,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탕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四方合戰, 斬煞蕩盡.
신묘년 외에도 왜국과의 전쟁에 대한 기록은 이렇게 많습니다. 백제, 신라와의 관계보다 훨씬 더 많은 기록입니다. 이 모든 것도 조작이라 하실 겁니까? 신묘년 기사를 일본측의 주장대로 해석하지 않으면, 어째서 왜국과 통한 것이 고구려의 노객이 되겠다는 맹세를 어긴 것이 되는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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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쪽의 얘기라면 '일본서기'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일본서기는 일본학자들까지도 과장과 허구로 인행 진위성을 의심하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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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의 상당 부분이 미화되고 초기 연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없는 사실을 완전히 새로 만들어낼 정도의 완벽한 날조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정확도가 삼국사기보다 뛰어난 경우가 이미 몇차례 증명되었습니다.
무령왕의 출생연도와 이름은 무령왕릉이 발굴되어 일본서기가 삼국사기보다 정확한 것으로 증명되었고, 무령왕이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 역시 작은 아버지인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게 되는 문제가 발견되어 이기동에 의해 부정, 일본서기가 정확함이 드러났습니다.
또한 삼국사기 잡지에 실린 우륵의 12곡의 이름이 가야의 지명이라는 것은, 일본서기가 없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최근 함안에서 발견된 대형 건물터도 국내의 일부 학자들은 일본서기에 언급된 고당회의 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박제상의 인질 구출 사건이나, 석우로의 죽음 등이 일본서기에도 기록되어 있어, 삼국사기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일본서기가 삼국사기보다 먼저 만들어진 책이란 걸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또한 교과서에서 강조되고 있는 왕인 박사의 문화 전파 등의 기사는 모두 일본서기에서 나오는 것이지, 삼국사기에는 단 한마디도 언급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리한 기록은 그대로 전재하면서, 불리한 기록은 왜곡 날조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열한 태도는 버려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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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사서에 관해서는 애왕 책봉기사를 말씀하시는 거 같고, 그것도 정확한 근거는 아니고, 우리나라 사서 어디에 그런 내용이 실렸다는 거죠? 제가 알기로는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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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님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먼저 삼국사기에 실린 신라 백제와 왜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사를 봅시다.
元年三月, 與倭國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爲質. (實聖尼師今)
百濟人前入倭, 讒言新羅與高句麗謀侵王國, 倭遂遣兵邏戍新羅境外. (朴堤上)
六年夏五月,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爲質. (阿莘王)
迎古王子扶餘豐,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 (義慈王二十年)
신라 백제 모두가 왜국에 인질을 보내고 있고, 왜국은 신라 국경 밖에서 왜군을 보내어 순라를 돌고 있습니다. 위에서 제시하지 않았으나 신라는 왜국의 수차례 침입을 받고, 백제는 왜국에 가있던 인질이 왜왕에게 애걸복걸하여 백제에 돌아와서 왕이 됩니다.
문제는 이 반대의 경우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왜국이 신라 백제에 인질을 보낸 경우가 한 번도 없고, 애걸복걸한 적도 없습니다. 삼국사기를 읽은 분이라면 위와 같은 질문을 하실 수 없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보입니다. 왜국과 가야의 관계를 고래와 작은 물고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사서에 애왕 책봉기사는 왜국과의 관계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엉뚱한 소리는 하시면 안됩니다. 중국의 사서에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입니다.
元嘉二年, 倭國遣使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宋書,南齊書)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多珍物幷敬仰之恒通使往來(隨書)
송서의 기록이야 왜국의 자칭이니 허풍이라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서의 기록은 왜국의 자칭도 아니기 때문에 그냥 넘길 수가 없습니다.
정리하면, 삼국사기, 삼국유사, 송서, 남제서, 수서 등, 한반도와 중국의 사서가 당시 백제 신라와 왜국의 관계를 똑같이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대국으로 보았고, 인질을 보냈다고 말입니다. 게다가 삼국사기에는 왜군이 신라국경밖에서 순라를 돌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때는 가야 멸망전입니다.
도대체 뭘 읽으신지 궁금하군요.
───────────────────────
그리고, 왜계 유물이라는 것은, 일본과의 교류를 말하는것입니다. 일본 지배의 흔적이 되려면, 일본식의 건축물이나 무덤 등 들이 발견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
이미 발견되고 있습니다만? 전방후원분이라는 이야기 못들어보셨는지요? 하니와라는 말 못들어보셨는지요?
이런 상식조차 모르면서 안타깝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심히 주제파악이 결여된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세를 부리면 자신만 파탄납니다.
───────────────────────
요즘 일본 학계내에서도,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 부정하는 기류가 큰걸로 아는데, 제 생각으로는 좀 안타까운 의견이시네요
───────────────────────
부정이 아니라, 근거 부족으로 보류중입니다. 어디서 주워들은 걸로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임나일본부 보류는 쓰다 소키치 등에 의해 시작된 것입니다.
삼국사기조차 읽지 않았으면서 아는 척을 하며 허세를 부리는 분들이 계시는데, 조용히 계시는게 망신 당하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코멘트에 반론을 하고 싶다면, 먼저 위에서 제시한 사료 원문들의 해석문을 제시한 뒤에 하기 바랍니다. 그런 뒤에도 우리나라 자료에 그런 내용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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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0/2006 12:14:07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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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고구려가 자신들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던 때 자기 나라를 뽐내는 글을 쓰면서 왜가 세력을 떨치는 것을 기록했을까요?
───────────────────────
비교대상이 있어야 뽐낼 것 아닙니까. 호태왕비를 보면 고구려의 주적은 백제가 아니라 왜국입니다. 이것은 신묘년 외의 부분을 봐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안타까운 의견을 낸다고 하셨으니, 원문 정도는 해석할 실력이 있으시리라 믿고, 해석은 따로 기재하지 않겠습니다. 설마 원사료조차 읽지 못하면서 그런 주장을 하진 않으셨겠지요?)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住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 鹽城, 倭寇大潰, 城內十九, 盡拒隨倭, 安羅人戍兵. 殘倭潰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 ?連船???, 王躬率住討,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四方合戰, 斬煞蕩盡.
위는 신묘년 외의 왜국과의 전쟁 기록입니다. 백제, 신라와의 관계보다 훨씬 더 많은 기록입니다. 이 모든 것도 조작이라 하실 겁니까? 신묘년 기사를 일본측의 주장대로 해석하지 않으면, 어째서 왜국과 통한 것이 고구려의 노객이 되겠다는 맹세를 어긴 것이 되는지 문맥적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
일본쪽의 얘기라면 '일본서기'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일본서기는 일본학자들까지도 과장과 허구로 인행 진위성을 의심하는 것이고,
───────────────────────
일본서기의 상당 부분이 미화되고 초기 연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없는 사실을 완전히 새로 만들어낼 정도의 완벽한 날조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정확도가 삼국사기보다 뛰어난 경우가 이미 몇차례 증명되었습니다.
무령왕의 출생연도와 이름은 무령왕릉이 발굴되어 일본서기가 삼국사기보다 정확한 것으로 증명되었고, 무령왕이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 역시 작은 아버지인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게 되는 문제가 발견되어 이기동에 의해 부정, 일본서기가 정확함이 드러났습니다.
또한 삼국사기 잡지에 실린 우륵의 12곡의 이름이 가야의 지명이라는 것은, 일본서기가 없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최근 함안에서 발견된 대형 건물터도 국내의 일부 학자들은 일본서기에 언급된 고당회의 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박제상의 인질 구출 사건이나, 석우로의 죽음 등이 일본서기에도 기록되어 있어, 삼국사기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일본서기가 삼국사기보다 먼저 만들어진 책이란 걸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또한 교과서에서 강조되고 있는 왕인 박사의 문화 전파 등의 기사는 모두 일본서기에서 나오는 것이지, 삼국사기에는 단 한마디도 언급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리한 기록은 그대로 전재하면서, 불리한 기록은 왜곡 날조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열한 태도는 버려야 됩니다.
───────────────────────
중국의 사서에 관해서는 애왕 책봉기사를 말씀하시는 거 같고, 그것도 정확한 근거는 아니고, 우리나라 사서 어디에 그런 내용이 실렸다는 거죠? 제가 알기로는 없는데...
───────────────────────
여수님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먼저 삼국사기에 실린 신라 백제와 왜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사를 봅시다.
元年三月, 與倭國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爲質. (實聖尼師今)
百濟人前入倭, 讒言新羅與高句麗謀侵王國, 倭遂遣兵邏戍新羅境外. (朴堤上)
六年夏五月,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爲質. (阿莘王)
迎古王子扶餘豐,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 (義慈王二十年)
신라 백제 모두가 왜국에 인질을 보내고 있고, 왜국은 신라 국경 밖에서 왜군을 보내어 순라를 돌리고 있습니다. 또한 신라는 왜국의 수차례 침입을 받고, 백제는 왜국에 가있던 인질이 왜왕에게 애걸복걸하여 백제에 돌아와서 왕이 됩니다.
문제는 반대의 경우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왜국이 신라 백제에 인질을 보낸 경우가 한 번도 없고, 애걸복걸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를 읽은 분이라면 없다는 말씀을 하실 수 없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보입니다. 왜국과 가야의 관계를 고래와 작은 물고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중국 사서의 애왕 책봉기사는 왜국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니, 애왕이 왜 나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발해의 애왕이 이 문제와 무슨 상관입니까? 허세를 부리려 엉뚱한 소리를 하시면 안됩니다. 중국 사서의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입니다.
元嘉二年, 倭國遣使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宋書,南齊書)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多珍物幷敬仰之恒通使往來(隨書)
송서의 기록이야 왜국의 자칭이니 허풍이라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서의 기록은 왜국의 자칭도 아니기 때문에 그냥 넘길 수가 없습니다.
정리하면, 삼국사기, 삼국유사, 송서, 남제서, 수서 등, 한반도와 중국의 사서가 당시 백제 신라와 왜국의 관계를 똑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백제 신라가 왜국을 대국으로 보았고, 인질을 보냈다고 말입니다. 게다가 삼국사기에는 왜군이 신라국경밖에서 순라를 돌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때는 가야 멸망전입니다.
도대체 뭘 읽으신지 궁금하군요.
───────────────────────
그리고, 왜계 유물이라는 것은, 일본과의 교류를 말하는것입니다. 일본 지배의 흔적이 되려면, 일본식의 건축물이나 무덤 등 들이 발견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
이미 발견되고 있습니다만? 전방후원분이라는 이야기 못들어보셨는지요? 하니와라는 말 못들어보셨는지요?
이런 상식조차 모르면서 안타깝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심히 주제파악이 결여된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세를 부리면 자신만 파탄납니다.
───────────────────────
요즘 일본 학계내에서도,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 부정하는 기류가 큰걸로 아는데, 제 생각으로는 좀 안타까운 의견이시네요
───────────────────────
부정이 아니라, 근거 부족으로 보류중입니다. 어디서 주워들은 걸로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임나일본부 보류는 재야가 식민사학자라고 그렇게도 욕하는 쓰다 소키치 등에 의해 시작된 것입니다.
삼국사기조차 읽지 않았으면서 아는 척을 하며 허세를 부리는 분들이 계시는데, 조용히 계시는게 망신 당하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코멘트에 반론을 하고 싶다면, 먼저 위에서 제시한 사료 원문들의 해석문을 제시한 뒤에 하기 바랍니다. 그런 뒤에도 우리나라 자료에 그런 내용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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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10/2006 12:31:30 AM
위의 리플은 고려청자에게 하는 말이지 개울물님에게 드리는 말씀은 아니니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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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09/2006 08:42:52 P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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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09/2006 08:37:05 PM
위의 두 탁본이 같다고 보는 사람은 글쎄요... 없을 것 같은데요. 개울물님의 말씀을 듣고 두 그림을 잘 살펴보니, 같은 비에서 탁본을 떳따고 하는건, 일본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과 다를바 없는데요.
우리의 고대사를 한낱 소설에 불과한 일본서기에 끼워맞추는 쪽이 더 낫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입니다.
공부좀 더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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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려청자 to 역갤 블로그 at 5/09/2006 08:33:26 PM
궁금한게 있습니다. 위 2개의 탁본을 비교해 보면 탁본의 세세한 부분이 일치하고 있지 않습니다. 획의 굴거나 얇다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글자에서 획의 모양이 다른 것 같습니다. 탁본에 지식이 없어서 그러는데 왜 저런 현상이 생기는지요? 예로 위에서 3번째줄 왼쪽에서 2번째 글자를 보면 (한문은 몰라서 -.-) 왼쪽에 3개의 점이 있는데 맨 위의 점의 위치가 많이 다릅니다. 왼쪽 탁본을 보면 글자의 5번째 획(-)에 비해서 점(`)의 위치가 더 위쪽에 있는데 오른쪽은 더 아래쪽에 있습니다.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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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개울물 to 역갤 블로그 at 5/09/2006 08:21:28 PM
장군들이나 입을 법한 화려한 갑옷들이 실전에서 사용된 배경을 들자면 본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은 11세기 이후부터 봉건제로 들어가기 때문에 실질적인 전투의 주체는 돈이 많고 영지를 소유한 무사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두가 저런 정규 오오요로이를 입을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동환이나 복권처럼 간소화된 갑옷도 있었지만 색실로 화려하게 치장된 것은 다를 바가 없었고 나중에는 이것들도 정규 무장들이 착용하게 됩니다.
잡병들이나 입는 하라아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외관을 하고 있었구요. 일본 갑옷이 그나마 비교적 수수해지게 된 원인을 찾자면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기존처럼 작은 철판을 엮는 방식이 아닌 큰 철판을 사용해 서양판갑처럼 변해가면서 색실이 들어갈 여지가 별로 없어지면서부터입니다.
물론 이 시절에도 장수들은 투구 앞에 다는 마에다테를 독특한 형상의 것으로 함으로써 나름대로 자기를 표현하고 멋을 부렸지만, 첫번째 사진을 클릭해 보셔도 알수 있듯이 기존의 갑옷보다 화려함이 덜한 것은 어쩔 수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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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충성용감단결 to 역갤 블로그 at 5/09/2006 08:08:29 AM
사진에 나온 "무라사키고스소오도시요로이" 같은 것들이 정창원이나 신사에 전해내려오는 것은 맞습니다만, 당시에는 저런 것들이 실전에 쓰였고 지금도 상당한 숫자가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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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충성용감단결 to 역갤 블로그 at 5/09/2006 08:00:17 AM
실전에 사용한 것은 사진처럼 알록달록 하지는 않다고 해요. 전해내려오는 일본갑옷중 화려한거는 전부 신사에 안치된 의식용 갑옷이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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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자뷰 to 역갤 블로그 at 5/09/2006 12:21:51 AM
일본의 전성기가 언제인지... 여러개의 일본갑옷을 보여주는 사진은 어느 특정한 시대만 보여주는게 아니라 아스카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까지 갑옷의 변화 모습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려시대 갑옷은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정지장군의 경번갑 정도이고 이건 기본적으로 체인 메일에다가 동체 부분에만 철판을 덧대서 방어력을 강화한 그런 물건이고, 그 외에 고려시대 갑옷이 이렇다 할 만큼 정확한 형태를 보여줄 만한 유물도 많지 않고 정립도 잘 되지 못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삼국시대 갑옷은 더 심각해서 철판을 엮어 만든 갑옷은 가죽끈이나 군용 의복 등은 죄다 썩어서 없어져 그 원형을 추정하는 것도 힘이 들 지경인데 중요한 단서가 될 러멜러 플레이트조차 우리나라의 산성토양 덕택에 죄다 부식되어 하다못해 철판의 구멍으로 엮는 방식을 추정하기조차 쉽지가 않은 상황이고, 나오는 것도 일본의 단갑이나 괘갑과 겹치는 형태의 물건이 많습니다. 물론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긴 해도.
일본갑옷이 판갑이었던 것은 헤이안 시대 이전의 일이고 본문에서도 언급되어 있지만 나라시대 이후의 일본 갑옷은 한반도에서 도입된 괘갑, 그러니까 철판을 엮어 만드는 갑옷을 바탕으로 발전됩니다. 이후 등장하는 오오요로이, 하라마키, 도오마루, 하라아떼 등의 갑옷이 모두 철판을 엮어 만드는 것이고 표면에 돌출된 복잡한 색색의 실들이 모두 그 철판을 엮어내고 있는 연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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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충성용감단결 to 역갤 블로그 at 5/08/2006 11:56:07 PM
잘나가다 다단계는 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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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08/2006 10:33:50 PM
랄횽은... 진짜.. 진짜 -_-;
다단계라지만... 진짜 대단하다...
ㅡ.ㅡ;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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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 to 역갤 블로그 at 5/08/2006 09:57:06 PM
글쎄요... 일본의 전성기때의 갑옷 같은데,, 그럼 우리나라도 조선때보다는 고려나 삼국시대 전성기 갑옷을 보여줘야 하는게 아닐까요 ?
그리고, 일본갑옷이 그리 화려해 보이지도 않고, 실용성이 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일본갑옷은 거의 판갑 수준인데, 판갑은 실용성이 없습니다. 뭐, 사진자료는 조선시대의 갑옷 같은데,,, 조선때의 갑옷은 작은 철판을 비늘처럼 엮어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도 있고, 화살등을 막을때 유용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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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g-_- to 역갤 블로그 at 5/08/2006 08:37:30 PM
랄라꿈은 기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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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살라딘 to 역갤 블로그 at 5/08/2006 04:08:48 PM
예전에 독도가 한국땅이라는걸 확실히 알겠다고 하신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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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yhn217 to 역갤 블로그 at 5/08/2006 12:00:32 PM
대단합니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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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yhn217 to 역갤 블로그 at 5/08/2006 12:03:19 PM
이런 글을 보면 내 글이 참 뻘글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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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로직 to 역갤 블로그 at 5/08/2006 12:31:04 AM
보트피플 앞에서 '베트남 민족의 통일 방해 운운'이란 소릴 해봤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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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07/2006 09:47:58 PM
이 글은 제가 쓴게 아닙니다;; 충성용감단결님이 쓰신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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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07/2006 09:36:50 PM
호오.. 그렇군요 ^^ 재미있네요. 블로그 업데이트 블로그 업뎃하시느라, 글고 역갤 블로그 하시느라 바쁘신거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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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ernal Melody to 역갤 블로그 at 5/07/2006 09:12:19 PM
역사적인 내용은 부수적인 것이고 사실상 제일 근본적인 것은 한미를 비롯한 참전국들의 명분이 남베트남 정부의 참전요구를 받아 참전했다는 점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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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충성용감단결 to 역갤 블로그 at 5/07/2006 08:05:56 PM
독일인 중 금발 푸른 눈은 15%밖에 안 된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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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으흠 to 역갤 블로그 at 5/05/2006 09:17:06 AM
좋은 게시물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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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갈라전 to 역갤 블로그 at 5/03/2006 01:35:13 AM
판타지 라이브러리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입문서로 좋다는 얘길 들은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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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03/2006 12:06:16 AM
본문에서도 밝혔지만 홈페이지가 사라진 상태라 그림이 모두 X박스로 나오더군요. 그래서 본문을 읽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 같아 모두 지웠습니다.
칼의 외형은 아쉬운대로 중국의 무기를 참고하시는 수밖에 없을 듯 싶습니다. 충성용감단결님의 말씀에 의하면 판타지라이브러리의 내용이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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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03/2006 12:05:49 AM
사진을 넣어주었다면 좋았을텐데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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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흐물흐물 to 역갤 블로그 at 5/02/2006 03:14:38 PM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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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01/2006 01:29:57 AM
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글 주변에 흰 상자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blockquote 명령을 쓰면 됩니다.
[blockquote] 글 내용 [/blockquote]
여기서 []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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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5/01/2006 01:26:33 A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