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그 문제에 대해서 예전에 역갤에서 논의한 적이 있는데, 관구검측의 총병력이 더 많았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었던 걸로 끝이 났었습니다.
관구검 기공비에는 '토구장군 외오환선우'라 하여 오환족이 관구검을 지원한 것이 나오는데, 이 오환세력은 삼국지에 나온
「우북평 오환 선우 구루돈, 요서 오환 도독 솔중왕 호류 등, 옛적에 원상을 따라 요동으로 달아난 자들이 무리 5000여명을 거느리고 항복했다.(右北平烏丸單于寇婁敦、遼西烏丸都督率衆王護留等, 昔隨袁尙奔遼東者, 率衆五千餘人降.)」
이 세력으로 추측되므로 이들 5천여명을 별도로 합쳐도 관구검측의 병력은 1만 5천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구려측의 군사(2만)가 더 많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을지문덕님께서 "김한규 교수의 『요동사』에는 모용선비의 목연이 관구검을 따라 고구려를 정벌하는데 공을 세워 좌현왕이 되었다"는 부분이 있다고 말씀주셨으므로 찾아본 결과 위서에 해당 부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魏書卷九十五 列傳第八十三
祖木延,從毋丘儉征高麗有功,加號左賢王 。
조부 목연이 관구검을 따라 고구려를 정벌하는데 공이 있어 좌현왕을 더하였다.
그렇다면 선비도 관구검을 지원한 것이 되므로 이들 병력을 별도로 더하게 되면 관구검측의 병력이 더 많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됩니다.(다만 관구검의 병력 1만에 이들 오환과 선비가 포함되는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의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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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1/31/2007 07:00:23 PM
검색해보니 좋은 링크가 많군요..
http://www.kbs.co.kr/radio/1radio/history/aod/1339526_1174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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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나가다가... to 역갤 블로그 at 1/31/2007 07:37:06 AM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관구검의 고구려 침입과 관련하여 비슷한 의문을 제기하고 상세한 분석을 해놓으신 분이 있네요.
http://bbs.defence.co.kr/bbs/bbs.cgi?db=history1&mode=read&num=11432&page=6&ftype=6&fval=&backdept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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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나가다가... to 역갤 블로그 at 1/31/2007 07:23:38 AM
위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에 따르면 위궁이 초기에 두차례 승리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위의 대병이 우리의 소병보다 못하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대병, 소병은 일반적으로 군사수를 의미하지 강하고 약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볼 때 실제 전투병은 위나라쪽이 더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가지 더 참고할 것은 광개토왕 이전의 고구려는 부족연맹체적 성격이 강하여 대군의 기습이나 침입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체제였습니다. 대군을 동원하여 적의 침입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성 단위로 길목을 막는 수준의 방비체제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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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나가다가... to 역갤 블로그 at 1/31/2007 06:51:09 AM
二十年(246),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毋丘儉, 將萬人, 出玄 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 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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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나가다가... to 역갤 블로그 at 1/31/2007 06:46:15 AM
언급하신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지요...
二十年(246),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毋丘儉, 將萬人, 出玄 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 原.
초반에 위궁이 두 차례 승리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건 중요한게 아니고... '위의 대병이 우리의 소병보다 못하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무리 봐도 이건 군사수 면에서 고구려가 더 많았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장수왕 이전의 고구려는 왕권이 매우 취약하고 부족 연맹체 성격이 강하여 대군의 침입에 국력을 모두 기울여 대항할 수 있는 체제는 아니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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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나가다가 to 역갤 블로그 at 1/31/2007 06:45:31 AM
고람진명행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님이 제시한 봉니 글 중 근거 3과 4에 예를 더 들어주시면 고맙겠는데 예를 들어 한서에 나오는 서구가 서한 어느 황제때 사람인지? 또한 이 구절의 출처기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해주시면 고맙겠고...
4는 좀 무성의한 답변같군요...고람님이 직접 해명한 것이 아니고 국립박물관에서 이렇게 했으니 믿어라식이네요...솔직히 4는 과연 근거에 해당이나 되는 것인지...
답변 부탁드립니다. 3과 4에 대한 보다 정치한 설명이 있어야 님의 주장이 더 설득력있지 않을까요? 뭐 1과 2에 대해서는 저도 별 불만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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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두철액 to 역갤 블로그 at 1/29/2007 11:42:33 AM
로마와 고구려는 실제 이길 때도 있었고 질때도 있었습니다.
승패의 조건이란 다분히 유동적이기 때문이죠.
조건을 동등하게 고정한 가정하에라면, 붙어봐야 압니다.
당시의 전반적인 두 나라의 국력이나 무기,전술체계은 규모나 운용면에서 크게 차이나지 않았죠.(물론 시대별로 우열은 존재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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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naKid to 역갤 블로그 at 1/26/2007 04:02:47 PM
천우협은 처음들어보지만 123번은 이미 많이 들어본것.
동학이 계급혁명이라는것 자체가 쌩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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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카나리아 to 역갤 블로그 at 1/22/2007 09:08:20 PM
본문 잘봤습니다.
건백 : 과거 왕 또는 조정에 대해 의견을 말하는 것(のべる(述べる))를 한국어로 번역하기 미묘하네요); 건의.
그나저나..
무식한 쇤네 아뢰옵니다만,
대한화사전이 무엇이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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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카나리아 to 역갤 블로그 at 1/22/2007 08:57:35 PM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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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웃음:) to 역갤 블로그 at 1/21/2007 05:23:01 PM
비잔틴 기병을 만지케르트에서 맞붙게 하셨다는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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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나가는 사람... to 역갤 블로그 at 1/21/2007 03:07:25 PM
자영농 중심 체제에서 더 많은 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다면 화기 시대 초기에도 그렇게 되어야 할 텐데 프로이센의 경우는 귀족 중심이었어도 대규모 병력을 무장시켰잖아. 그렇다면 대규모 병력의 무장 여부는 자영농 중심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재정과 더 밀접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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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옐로싸인 to 역갤 블로그 at 1/09/2007 11:56:15 PM
그리고 화기 시대에는 귀족중심이건 자영농중심이건 다 똑같아졌다는 말은 무슨 의미야? 총의 경우 화기 시대 이후로도 상당기간 동안 고가의 장비였다고 알고 있어. 고가의 장비였다면 화기 시대 이전이나 이후나 모집병들을 무장시키기 어려웠던 점은 마찬가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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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옐로싸인 to 역갤 블로그 at 1/09/2007 11:16:58 PM
국민개병제를 할 당시의 스웨덴은 자영농 중심의 사회였다고 알고 있어. 무장 상태는 군주와 봉건귀족들의 재정과 필요에 따라 좌우된다고 봐. 군주와 귀족들의 재정이 튼튼하고 모집병들을 잘 무장시킬 필요가 있다면 자영농 중심이 아니어도 모집병들을 잘 무장시킬 수 있다는 거지.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의 경우 유코횽의 말대로라면 그동안 소수정예로도 충분히 통했다고 할 수 있는데, 대홍수 시기에는 이게 더이상 통하지 않았고 군주와 귀족들이 군사체제를 변화시키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걸 꼭 자영농 육성과 연결시킬 필요가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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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옐로싸인 to 역갤 블로그 at 1/09/2007 11:09:05 PM
내가 명확하게 해둘게. 자영농을 육성한 결과가 대규모병력동원이라고 한적은 없지만 내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특성과 다른나라들과의 차이점을 본문중에 설명하지 않아서 횽이 헷갈려한거가터. 봉건제국가의 특징은 유럽적으로 말하자면 소수의 정예(기사)와 다수의 모집병들로 나뉜다는건데 전투에선 거의 이 소수의 정예들에 의해 승패가 갈라졌어. 근데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소수의 정예인 기병들이 워낙에 효율적인 기능과 편제를 갖고있다보니 굳이 대규모의 모집병들을 군사로 사용할 필요를 못느꼈고 그래서 소수의 정예들 그 자체가 군대의 거의 모두를 이루는 형국이 된거지. 그래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인구에 비해 군대의 숫자가 적은거였고. 이부분은 위의 리플에 이미 한번 썼던건데 안읽어봤3?
그리고 내가 훈련을 언급한 이유는 무장이 훈련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 때문이야. 전투가 어차피 소수정예에 의해 결정난다면 나머지 모집병들은 훈련시킬 필요를 별로 못느끼지만 자영농들은 무장상태가 일반모집병들보다 훨씬 좋고 따라서 이런 병사들을 일반모집병들같이 그냥 내버려두기보다 체계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더 이익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자영농출신의 병사들은 훈련상태가 대체적으로 훨씬 좋아.
물론 일반모집병들도 자영농군대 못지않게 훈련받는 수도 있어.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들은 전투에서 소수정예들처럼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고 따라서 자영농군대처럼 훈련을 받는것이 일반화되어있지 않았지.
마지막으로 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인구대비군대의 숫자가 적다는 것을 예로 들때 스웨덴과 비교를 했을뿐 스웨덴이 자영농을 육성해서 대군을 동원했다고는 안했3 스웨덴은 일종의 국민개병제를 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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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玉蔚亞育護 to 역갤 블로그 at 1/09/2007 08:04:33 PM
봉건제에 대해서 내가 너무 광범위하게 쓴 것은 인정해. 화기시대 이후 국가들은 중세식 봉건 국가는 아니었지. 내가 봉건제라고 쓴 것은 프로이센의 경우에 농민의 예속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간 것을 지칭했던 거야. 자영농 육성과 대비해서 쓴 거지. 내가 정확하게 쓰지 않은 점은 사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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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옐로싸인 to 역갤 블로그 at 1/09/2007 12:41:37 PM
유코횽이 본문에 자영농 육성의 장점으로 언급한 것은 훈련받은 대규모 군대를 양성할 수 있다는 거였지. 그래서 내가 훈련을 언급하는 거야. 그런데 덧글에서 훈련이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본문의 내용과는 모순되는 걸로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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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옐로싸인 to 역갤 블로그 at 1/09/2007 12:37:35 PM
십자군의 경우 기사가 중심인 것은 사실이야. 이런 면에서 소수정예라고도 할 수 있어. 그런데 십자군 병력에서 기사가 차지하는 비율은 소수였어.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10-20%정도였던 것으로 알고 있지. 나머지 80-90%는 창병과 석궁병등의 보병이었고. 미스토횽이 쓴 글을 보니까 십자군의 보기합동은 상당히 뛰어났다고 하더군. 보기합동이 잘 되었다는 말은 기사들 뿐만 아니라 보병들도 상당히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는 의미라고 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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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옐로싸인 to 역갤 블로그 at 1/09/2007 12:34:03 PM
유코횽이 자영농 문제를 본문에 언급한 것은 소수정예 군대와 양질의 훈련받은 대규모 군대를 비교하면서 나온 거지.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과 스웨덴, 러시아를 비교하면서 스웨덴과 러시아는 자영농을 육성해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고 언급했어. 내가 서유럽과 일본의 예를 든 것은 봉건제 하에서도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예를 든거야. 임진왜란이 단순히 서로 다른 전술과 무기체계 때문만으로 일본이 초반에 우위를 차지했던 걸까?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내 총병력은 56만 3천명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 당시 명의 경우는 편제는 서류상 편제는 3백만이라고 하지만 실제 동원 가능 병력은 50여만 정도라고 들었어. 일본과 비슷한 규모였다는 거지. 명나라의 인구가 일본보다 몇배나 많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인구대비 병력 동원 능력은 일본이 훨씬 컸다는 얘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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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옐로싸인 to 역갤 블로그 at 1/09/2007 12:17:29 PM
문제는 훈련이 아니라 장비야. 화기 이전에는 군대의 차이는 곧 장비의 차이에서 나타나는데 화기로 인해 무장을 잘갖추고 못갖추고의 차이가 무의미해진거지. 화기 등장이전에는 소수의 완벽한 장비를 갖춘 소수정예중심이냐 완벽한 무장까지는 아니라도 어느정도 무장을 갖추고 나서는 자영농중심이냐에 따라 전술과 편제의 효율성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게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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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玉蔚亞育護 to 역갤 블로그 at 1/09/2007 12:11:00 PM
싸인횽이 든 예는 자영농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야. 십자군이나 임진왜란같은건 서로 낯선 전술을 상대하는데 따른 부분적인 우위라고 할수있지 자영농이니 봉건제니 하는건 관계가 없어. 그리고 모집병들의 경우 그건 훈련의 문제가 아니라 무기의 효율문제야. 그래서 내가 화기를 언급한거자너. 소수정예의 경우 내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다른 국가들의 차이를 명확히 하지 않아서 그런탓도 있지만 굳이 말하자면 소수정예는 봉건제에선 어느나라나 있어. 다만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기병편제가 워낙 효율적이다보니 굳이 모집병들을 대규모로 징집할 필요를 못느꼈고 그래서 인구대비군대의 숫자가 적은거였지. 그리고 화기시대 이후의 국가들 중 중세식봉건국가가 있기나했3? 영국이나 일본같은 섬나라들은 별개로 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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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玉蔚亞育護 to 역갤 블로그 at 1/09/2007 11:56:32 AM
내가 서유럽과 일본의 예를 든 이유는 간단해. 자영농을 육성하지 않더라도 군사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야. 그런 의미에서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의 쇠퇴를 자영농 육성의 실패에서 찾는다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한 거야. 모집병들이 훈련을 적게 받느냐 많이 받느냐를 언급한 건 유코횽이 소수정예와, 양질의 훈련받은 대규모 군대를 비교했기 때문이야. 나는 그 말을 자영농 중심의 체제에서만 양질의 대규모 군대를 동원할 수 있고 봉건제 하에서는 소수정예만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해석했어. 그래서 봉건제에서도 얼마든지 훈련받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모집병들의 훈련을 언급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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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옐로싸인 to 역갤 블로그 at 1/09/2007 08:23:28 AM
들었던 예가 부적절해보여서 한말23 대체 서유럽의 군사적성공(아마 십자군전쟁 밑 재정복을 말하는거겠지?)과 일본의 군사적 발달이 자영농과 뭔 상관이며 토인비가 말하는 쇠퇴가 그런 의미의 쇠퇴도 아니고 모집병들이 훈련을 만이 받고 적게 받고는 전혀 자영농문제하곤 상관없자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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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玉蔚亞育護 to 역갤 블로그 at 1/09/2007 07:03:34 AM
유학이라서 양반이 아니라는건 좀 딱딱하지 않을까 합니다.
결국 양반은 원래 관료와 그 자손들을 말하는 것이고 결국 군역을 면제받는
계급일 뿐입니다. 유학이라고 해서 양반층이 가진 면역권을 못가진 것도 아니고
결국 전 인민의 양반화의 한 모양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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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 to 역갤 블로그 at 1/09/2007 06:39:17 AM
아 그렇군요. 고람진명행님 덕분에 많은걸 알게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고 싶었던건(워낙에 말재간이 없어서...) 한초의 종묘제도는 종묘의 숫자에 대한 제한도 없었고, 종묘를 한곳이 아닌 분산 설치하는 등 고람진명행님이 본문에서 앞서 말한 7묘제와는 거리가 멀었고 이런 상황에서 설치된 군국묘가 과연 원제이후의 종묘개혁을 거친 뒤의 상황과 비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말재간이 없어서 자꾸 삼천포로 빠져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하네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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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ㅇㄹ to 역갤 블로그 at 1/09/2007 12:43:21 AM
한국에도 전통문화를 알리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져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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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희대제 to 역갤 블로그 at 1/09/2007 12:40:15 AM
군사적 성공과 발달에 대해 얘기했어. 그중에서도 병력 동원 능력과 군사 조직 능력에 대해서 언급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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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옐로싸인 to 역갤 블로그 at 1/09/2007 12:02:57 AM
옐로싸인횽아 횽이 말하는 성공이나 발달이 대체 무슨 분야에서의 성공과 발달인지를 좀 명확히 해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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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玉蔚亞育護 to 역갤 블로그 at 1/08/2007 08:54:39 PM
족보님 상세한 자료제공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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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희대제 to 역갤 블로그 at 1/08/2007 05:54:16 PM
4.1kg이면 사람 머리 무게랑 똑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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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나가다 to 역갤 블로그 at 1/08/2007 05:02:38 PM
토인비가 쓴 역사의 연구에서 로마의 쇠퇴 시기를 한니발 전쟁 이후로 기술한 것을 읽은 기억이 있어. 한니발 전쟁으로 이탈리아의 농토가 많이 황폐화되어 자영농이 몰락했기 때문이라는 논지였어. 그런데 한니발 전쟁 이후에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이 있은 후에 로마군은 오히려 더 강해졌지. 물론 카르헤 전투나 토이토부르크 전투처럼 참패를 겪은 적도 있었지만 제국을 건설했어. 물론 말기에 들어가면 그 전력이 크게 약화되지만 말이야. 이걸 보면 자영농 중심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병력을 동원하고 얼마나 효율적으로 군사를 조직하느냐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자영농 중심이 아니어도 그건 가능할 수 있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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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옐로싸인 to 역갤 블로그 at 1/08/2007 01:00:14 PM
유코 횽의 글 뿐만 아니라 다른 횽들의 글을 보면 자영농 육성이 국가 융성에 도움이 되고 봉건제는 해롭다는 뉘앙스로 쓰는 경우를 가끔씩 보게 돼. 유코 횽은 화기 발달과 관련시켜 설명했지만 화기 발달 이전은 어떨까? 본문에 언급한 비잔틴은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테마타가 쇠퇴하고 프로노이아를 통한 봉건화가 일어나서 국력이 쇠퇴해졌다고들 하지. 그럼 동시기에 이미 봉건화가 진행되었던 서유럽의 군사적 성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조선과 중국에 비해 일본은 자영농이 아닌 봉건영주와 무사계급 중심이었지. 그러나 일본의 군사적 발달은 자영농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아니라 봉건제 하에서 일어났지. 임진왜란 때까지만 해도 화기가 다른 병종들을 대체할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은 잘 알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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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옐로싸인 to 역갤 블로그 at 1/08/2007 12:50:28 PM
영국의 경우 섬나라의 특성이라고 밖에 할수없고 프로이센같은 경우는 화기의 발달과 연관지어서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인데 화기의 등장과 발달로 귀족들이 중장병력이나 기병을 이뤄서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시대는 지나고 지휘관으로만 참전하게 되는 시대가 온거지. 사실 자영농의 융성이 국가의 융성이던 시대는 전쟁이 백병전위주로 벌어지던 시대에나 통용되고 화기의 발달로 귀족들의 소수정예든 자영농들의 양질의 군대든 총앞에선 어차피 다 똑같아졌어. 그러니 시스템이 귀족중심이 되건 자영농중심이 되건 그게 그거가 됐지만 어느 시스템을 취하느냐는 국가마다 달랐지. 대체적으론 이왕에 똑같은거 기득권층의 기득권을 좀더 수호하는 방향으로 가는게 됐지만 말야.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화기가 아직은 기병들을 제압하지 못하던 시절에 있었고 그뒤 17세기 대홍수시대가 오면서 그 고비를 못넘기고 쇠퇴해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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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玉蔚亞育護 to 역갤 블로그 at 1/08/2007 12:23:29 PM
유코 횽의 글은 디코에서부터 언제나 재미있게 읽고 있어. 리플은 안달고 눈팅만 했지만. 이번 글을 읽다가 한가지 의문이 생기는데,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이 자영농을 육성하지 못해서 쇠퇴했다고 분석했잖아. 그런데 동시대의 영국을 보면 역시 자영농을 육성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 백년전쟁 때는 요우먼들이 장궁병과 창병 등으로 많이 활약했는데 이후에는 인클로저 운동 등으로 인해 자영농이 쇠퇴했다고 들었어. 또한 귀족과 지주들의 의회가 왕권을 제약한 것은 영국도 마찬가지였어. 19세기에도 영국 의회의 선거권자는 전체인구에서 극소수의 유산계습에 해당되었다고 알고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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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옐로싸인 to 역갤 블로그 at 1/08/2007 09:41:00 AM
제가 단 맨 위의 리플이 약간 에러가 있었군요.
제가 말한건 왕망에 의해서 7묘제가 제창된 것이 아니라, 진명행이 말하신대로 공우가 군국묘의 폐지와 함께 종묘를 고례에 맞게 7묘제로 개혁하자는 건의로부터 긴 논쟁이 있었고, 평제때 왕망의 상주에 의해 그 논의가 마무리 지어지고, 7묘가 완성되었다는 이야깁니다. 왕망이 7묘제를 주창하고 시행(?)했다는 것이 아니라.-출처는 니시지마시다오의 중국역사[진한사] 최덕경, 임대희 옮김 "즉 왕망의 상주에 따라 도황고의 묘는 폐지하기로 하고, 선제묘는 중종묘로, 원제묘는 고종묘로 하여 겨우 7묘가 완성되었다." p.340-
그리고 "종묘의 숫자는 기본적으로 "7"이라는 이상론에서 한치도 벗어난 적 없소."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알기론 위현성같은 인물은 종묘개혁논의 중에 처음에는 5묘제 그다음에는 6묘제를 주장하다가 마지막에 7묘제를 주장한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렇다면 줄곧 종묘개혁논의가 "7묘제"를 전제로 이루어졌다고는 할 순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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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ㅇㄹ to 역갤 블로그 at 1/08/2007 03:55:40 AM
ㅇㄹ햏. 왕망의 상주에 의해 7묘제가 정착되었다는 것은 어디서 들었소? 전한시대 元帝기에 이르러 종묘의 수가 9개에 달하자 7묘로 줄이자는 貢宇(공우)의 상주가 있은 뒤로 어느 묘를 훼철하고 어느 묘를 불훼할 것인지의 논의가 평제때까지 계속된 것이지 종묘의 숫자는 기본적으로 "7"이라는 이상론에서 한치도 벗어난 적 없소.
왕망은 애제때 皇高廟(황고묘)와 共皇廟(공황묘)의 사례처럼 한 왕실의 정통묘가 아니라 편법적으로 승격된 황묘의 철폐를 주장하였을 뿐이오. 그는 오히려 선제의 묘를 높여 중종으로, 원제의 묘를 높여 고종으로 각각 존호하여 기존의 종(宗)의 숫자를 4개로 늘여버림으로써, 자신이 新(신)왕조를 세운뒤 9묘제를 실현시켰던 인물이오.
왕망이 7묘제를 정착시켰다는 것은 당치 않은 주장임을 말하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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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孤藍 眞明行 to 역갤 블로그 at 1/07/2007 10:20:01 PM
미안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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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생각하는 나무 to 역갤 블로그 at 1/07/2007 04:41:51 PM
생각하는 나무햏은 생각을 좀 더 하시오. 듕국의 식민지였음을 입증하려는게 아니고 우매한 민족주의를 내세워 북한놈들과 같이 고대사를 왜곡하는 재야의 닭짓을 좀 말려보고 싶을 뿐이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사실을 탐구하는 것 이상의 불순한 의도가 섞여 있어서는 아니되오. 신채호가 사시미 칼 들고 설친다 해도 내래 아닌 것은 아니지 않겠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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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孤藍 眞明行 to 역갤 블로그 at 1/07/2007 04:38:31 PM
민족주의자 햏. 역사란 자랑스럽기만 해서는 아니되오. 자랑스러운 역사만을 내세워 이데올로기화 할때 또다시 히틀러같은 똘추들의 전횡이 나타나지 마란 법은 없소. 부끄럽고 빼앗긴 역사도 사실에 기반하는 이상 우리의 역사요.
무슨 식민지배 합리화 운운하는데 로마제국의 지배를 당당한 자기 역사로 받아들이고 있는 유럽인들은 조낸 캐안습 상병신 쉑히들이오? 과거를 제대로 성찰하지 못하면서 민족의 머리 속에 허황된 아집으로 채운다면 그것만큼 죄악이 따로 없소.
민족주의자행과 같이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를 부정하고 감추기에 급급한 단순한 역사인식은 오히려 주변 민족의 끊임없는 도전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지켜왔던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을 몰각하는 결과를 자초할 뿐이오.
한중양국의 관계에 있어 전쟁은 여러차례 있었지만 항상 중국의 일방적 승리로 끝난 것은 아니었소. 중국의 경우 수(隋)나라와 같이 고구려와의 국운을 건 전쟁에서 패배한 여파로 왕조가 붕괴되기도 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백제의 요서경략에서 보듯이 한국이 중국 내지에 군현을 설치하기도 하였소. 따라서 고대의 일회적 패배에 항상 위축될 필요는 없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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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孤藍 眞明行 to 역갤 블로그 at 1/07/2007 04:31:46 PM
ㅇㄹ햏. 군국묘의 정확한 묘제기록은 현재로는 찾기 어렵소. 한제국 건설 직후 숙손통이 종묘 설립을 제안한 이래로 장안(長安)에는 천자7묘제가 원칙으로 자리잡아 3소+3목+태조묘 = 7묘를 이상으로 하고 있었소. ㅇㄹ햏의 말대로 차츰 종묘의 수가 많아져 元帝 때에는 장안에 모두 9묘가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일시적인 것이고 처음부터 9묘가 되었던 것은 아닌 까닭에 다한 한대의 묘제는 7묘제로 보는 것이 학계의 공식적인 견해요.
그렇다면 군국묘의 경우 장안과 같이 7묘를 모두 두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禮記(예기)의 왕제(王制)에 의하면 제후국은 천자와는 달리 5묘를 설립하도록 되어있는 바, 제후의 4친묘와 시조묘만을 세우도록 되어있소. 한왕실은 여기에 자신들이 조와 종으로 추존한 3분의 황제묘를 추가로 세우도록 했으니 이것이 군국묘요.
따라서 군국묘가 설립된 군국의 경우 기존의 제후 5묘와 함께 추가로 2~3개의 묘가 추가로 설립되어 하나의 사당안에 모셔진 것으로 보여지오. 이미 들어선 기존 제후 5묘는 군국묘의 갯수에 포함되지 아니하오.
이와같이 모든 군국에는 선대 황제의 조서에 의거 고조와 문제의 묘는 기본으로 들어가고 여기에 무제가 순수(巡狩)했던 지역은 무제의 묘가 추가로 세워져 68 군국에 167개라는 군국묘 숫자가 나오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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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孤藍 眞明行 to 역갤 블로그 at 1/07/2007 04:11:07 PM
퍼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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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544 to 역갤 블로그 at 1/07/2007 03:57:56 PM
역갤에 한번 이글이 올라온다면 어떻게 될까요??-_-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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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G to 역갤 블로그 at 1/07/2007 03:40:02 PM
일본 고대사에서 한반도의 영향은 없었다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반도 고대사에서 중국의 영향은 없었다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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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 to 역갤 블로그 at 1/07/2007 01:10:17 PM
정말 우리나라가 듕국의 식민지였다는것을 그리 증명해주고 싶은 이유가 무었인지 묻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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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생각하는 나무 to 역갤 블로그 at 1/07/2007 12:17:03 PM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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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yhn217 to 역갤 블로그 at 1/07/2007 07:54:47 AM
고람 진명행 자네는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겐가? 그토록 우리나라가 중국의 식민지였으면 좋겠다는 뜻인가?
자네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 나라가 일제식민지를 겪었어. 사대주의 매국노들 때문에 이 땅의 조선인들이 고통을 받았단 말이네. 그런데도 어째서 이런 매국적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자네의 글을 보고 있자니 사대주의 매국노들의 역사 연구를 막아야 된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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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족주의자 to 역갤 블로그 at 1/07/2007 07:48:01 AM
전한시기 7묘제가 정해진건 평제때가 아닌가요...
원제무렵에는 태상황과, 도황고를 더해 9묘제였고, 이후 평제때 왕망등에 의해 7묘제로 낙찰(?)된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아참, 그리고 군국묘와 관련하여 68개 군국에 모두 167곳의 군국묘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하나의 군국마다 태상황이하 다수의 역대황제들의 위패를 봉안한 군국묘가 여러개가 설치된 것인가요? 숫자상으로 보면 적어도 군국묘는 특정황제의 사당이 다수의 군국에 설치된것으로 보입니다만... 잘 몰라서 질문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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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ㅇㄹ to 역갤 블로그 at 1/07/2007 12:15:40 AM
연안 이씨가 몽골계로 분류되는 이유는 무엇 인가요? 알려주시면 고맙겠 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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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ainmaker to 역갤 블로그 at 1/06/2007 11:05:59 PM
이거 퍼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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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ㄲㄲㄲ to 역갤 블로그 at 1/06/2007 10:51:27 PM
놀러왔다가 흥미있는 글을 보게 되어 코멘트 남겨 봅니다..
좋은 고찰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글에서 제시된 '순수혈통인 양반의 후손'이라는 개념이 이해가 안되는데요.
어떤 정의를 내린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양반이라는 개념 자체가 혈통이란 것과 그닥 관련 없는 것 같습니다.
문벌이나 집성촌 문제라면 모르겠지만 그건 양반 문제와 직접 관련하기 힘들구요.
뭐 족보에서 전부 관직을 지낸 조상들이 있는걸로 기록된 것에 신빙성을 검증할 필요가 있다 이정도 이야기라면 수긍이 갑니다만,
족보 보면 모든 조상들이 양반인 것도 아니에요.
예를들면 수원백씨 같은 경우엔 대표적인 중인 집안인데,
외교사절로 일본이나 중국 갔다가 부사 직책으로 공을 세우면 지방 현감 등의 벼슬을 제수받게 되는 식으로 해서 '양반'이 되는거죠.
하지만 아무래도 문벌이 딸리기 때문에, 결혼을 통해 가문의 권위를 높이려는 노력을 합니다.
예를들면 몰락하여 가난한 현풍곽씨 집안의 딸을 며느리로 삼는다든지 해서요.
물론 며느리를 데려올때는 현풍곽씨 집안에는 많은 혼수예물을 주죠.
노골적으로 말하면 존경받지만 가난한 몰락 양반의 '명예'를 며느리를 들임으로써 '돈 주고 사오는 것' 입니다.
자 여기서 현풍곽씨는 대대로 문벌이 훌륭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된 양반 집안인데
이제는 몰락하여 가난해 졌고 벼슬에 나가는 이도 뜸해졌어요.
양반일까요? 그렇다 칩시다.
그럼 수원백씨는 양반이 아니었는데 현감벼슬을 제수받아 양반이 되었습니다만 과연 양반일까요? 아무래도 문벌이 딸리니깐 주변에선 별로 안 쳐주겠죠?
하지만 양반가 며느리를 들여서 '우리도 이런 집안과 통혼할 정도로 권위가 있다'라고 과시합니다.
제가 보기엔 둘 다 양반입니다.
물론 그 현풍곽씨 집안은 한두세대 더 내려오면서 완전히 폭싹 망해서 농사짓고 땅파먹고 살게 됩니다. (몰락 양반의 전형적인 예)
심지어 그중에는 다른 양반집에 머슴으로 들어간 자손도 나옵니다.
이런 신분의 유기적인 이동이 조선시대에 의외로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훌륭한 집안들 중에는 대대로 벼슬을 얻고 집안을 유지해나가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요.
* 현풍곽씨, 수원백씨 이야기는 저의 외가쪽 관련해서 어른들한테 들었던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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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갸갹 to 역갤 블로그 at 1/06/2007 10:07:23 PM
족보 위조로 편입해 들어갔나 보군요 아님 뭔가 착오가 있거나
종가집에서 상당히 눈치를 줬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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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흠 to 역갤 블로그 at 1/06/2007 02:30:21 PM
저 같은 경우는 진성 이씨인데, 어렸을 때 안동에 있는 종가집에 한 번 간 적이 있었답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같은 날 종가집에 찾아오신 어른 한 분이 난리가 났던 게 기억납니다.
항렬을 셈하러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자기 조상 중 한 분은 어렸을 때 일찍 죽어 자식을 안 남긴 사람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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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어핀드 to 역갤 블로그 at 1/06/2007 02:06:58 PM
왕인에 대해선 낙랑 왕씨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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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나다가 to 역갤 블로그 at 1/06/2007 02:06:38 PM
그 결과 조선 중기 전체인구에서 2%였던 양반비율이 조선 말기에 들어서면 78%로 증가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이야기의 출처는 대구, 울산, 단성등지의 호적인데 조선후기의 세수와 관련된 경제분야의 자료로 사용되는 것은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이것을 가지고 당시 신분제를 다루는것에 대해서 요즘은 회의적이라고 하는군요... 첫번째로는 양반호로 분류된 호구들 중에 많은 수가 양반인 아닌 "유학"이고, 둘째로는 호적대장의 기입된 호구가 자연호인지 편제호인지에 대해서 이견이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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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ㅇㄹ to 역갤 블로그 at 1/06/2007 09:12:57 AM
오..엄청난 개념글... 역사를 보면 폴란드인들 러시아에 감정이 없을 수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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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니엘.J.다비 to 역갤 블로그 at 1/06/2007 02:26:32 AM
YS 탓만 할 수도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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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국체 to 역갤 블로그 at 1/04/2007 03:13:00 PM
앞으로 이 논의에 참여하시는 분들은 이 글 안에서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역갤블로그는 코멘트 분량의 제한이 없습니다.
다만 이녁님의 일제하 조선경제에 관한 글이나 고람 진명행님의 여운형의 행적에 관한 글처럼 구체적인 주제와 자료를 제시하는 글의 경우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포스팅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가치관이 중심이 된 추상적이고 비실증적인 글의 경우 앞으로도 코멘트나 자유게시판에서 논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치적 논쟁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어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하였으니 이해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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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역갤블로그 to 역갤 블로그 at 1/04/2007 10:33:10 AM
앞으로 이 논의에 참여하시는 분들은 이 글 안에서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역갤블로그는 코멘트 분량의 제한이 없습니다.
다만 이녁님의 일제하 조선경제에 관한 글이나 고람 진명행님의 여운형의 행적에 관한 글처럼 구체적인 주제와 자료를 제시하는 글의 경우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포스팅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가치관이 중심이 된 추상적이고 비실증적인 글의 경우 앞으로도 코멘트나 자유게시판에서 논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치적 논쟁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어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하였으니 이해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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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역갤블로그 to 역갤 블로그 at 1/04/2007 10:34:25 AM
crow님의 글을 코멘트로 이동하였습니다. 정치적 논쟁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어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하였으니 이해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이에 관한 논쟁은 여기에서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역갤블로그는 코멘트 분량의 제한이 없습니다.
다만 이녁님의 일제하 조선경제에 관한 글이나 고람 진명행님의 여운형의 행적에 관한 글처럼 구체적인 주제와 자료를 제시하는 글의 경우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포스팅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가치관이 중심이 된 추상적이고 비실증적인 글의 경우 앞으로도 코멘트나 자유게시판에서 논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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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역갤블로그 to 역갤 블로그 at 1/04/2007 10:22:04 AM
로직님 - 제 생각에는 로직님의 주장이야 말로 상식과 차이가 나는 것같아서 오히려 로직님이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를 제시하셔야 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현재 정치가나 관료의 상당수가 개발독재시절부터 이어져 왔다는 거는 인정하신다면 개발독재시절과 일제시대를 연결하는 고리가 6.25를 통해 끊어졌다고 하시는 건가요? 6.25를 통해 권력의 이동이 상당히 일어난 건 사실이지만 지주계층의 몰락이 두드러졌지 나머지는 비슷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당시 힘있고 출세했는 계층 즉 미군정에의해 등용된 일제시대 관료 등이 일반 국민들보단 전쟁통에서 살아남기에 유리했죠.서울지킨다는 말에 일반 국민들이야 다 믿었지만 고위층들은 진작에 한강다리끊고 남으로 피난갔죠.
VISTA님 - 음 이런 주장하시는 분들 많이 봤는데 일단 일제시대때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안했다고 모두 친일파로 보는 건 무리가 많다고 보는데요. 사람이 나약한지라 당시 일제에 순응하고 출세하려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한 분들은 그만큼 더 대단한 겁니다. 세상물정을 읽을 줄 모르는 고리타분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제글은 그 당시 수동적으로 일제에 협조했던 모든 사람을 악질적 친일로 몰아 마녀사냥하려는 의도는 전혀없고 지금 그게 가능하지도 않습니다.또 정의의 이름으로 당시 현실을 제단하려는 의도도 없습니다. 단지 그렇게 어쩔 수 없었다고 옹호해줄수 있다면 그당시 독립운동하신분들이 인간적인 한계를 극복한 것을 대단하게 보는 마음이 있을 수도 있을 텐데요. 독립운동하시분들이 못배우고 가진것없는 사회불만세력이라고 보신다면 역사를 좀더 공부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그분들의 후손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면 역사청산이 왜 중요한지 알수 있겠죠.
또한 이건 완전한 역사왜곡이라고 보는데 일제시대때 출세하고 사회적으로 상류계층에 있었던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그랬던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지주들은 계속 지주였고 대한제국당시 고위관료였는 사람들이 결국 을사오적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 아닌지? 무슨 일제시대가 되었다고 계층간 이동의 문이 열리고 사회가 능력위주로 돌아가고 그런거 없습니다. 일본국내에서도 지배계층은 유신을 성공시킨 이후로 변한 적이 없는데 그렇게 개방적이고 이상적인 사회인적 없습니다. 현실을 말하시면서 오히려 너무 이상적으로 접근하시는 것 같습니다.
쪽빛님 - 진지한 고찰이 왜 필요한지 목적의식 없이 그저 진지한 고찰이라고 하시면 조금 나이브해서 뜻이 잘 이해가 안됩니다. 그당시같은 상황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다라는 말로 모든 문제를 하나의 시각으로만 파악하려하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을 까요?
일제시대는 조선이 무능해서 된 것이 맞고 그것에 대해서는 매우 동조하는 입장입니다.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힘에 붙였던 것도 사실이지요.
그런데 당시에 아시아에서 식민지로 전락하는 걸 면한 것이 일본하나라는 사실을 볼 때 또 조선이 상대적으로 일본과 중국에 둘러쌓여 근대화의 충격을 늦게 받은 점을 고려하고 당시 국가적으로 쇠퇴기였다는 점도 고려하면 (상당히 변명이 많지만..;;) 조선은 쓰레기다 최악이었다고 하는 것은 균형잡힌 시간이 아닐 것입니다. 보통 일제시대 옹호하시는 분들은 객관적인 현실과는 달리 조선을 꽤나 평가절하 하시더군요. 그리고 임진왜란 전부터 원래 일본은 인구나 경제력 국토면적에서 조선보다는 상당히 우월했습니다. 그만큼 근대화에도 이점이 있었겠죠. 아무튼 그당시 조선이 일본에 비해 무능했던 건 저도 상당히 인정하고 또 식민지가 된건 조선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도 있겠죠.
그렇다고 해서 역사청산은 편집적으로 피해망상적이다라고 보는 건 오히려 열등감의 소치 아닐까요? 예를들자면 집밖에서 깡패한테 걸려서 맞고 들어오고선 내가 힘이 모자라서 당한 거야. 내가 힘을 키워야지라고 생각하는 건 문제가 없겠지만 깡패를 경찰에 신고하는 건 안돼 때린 깡패는 어쩔수 없어 본래 약한놈이 맞기 마련이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거와 같지요.
일제시대가 모두 일본이나 친일파의 문제다라고 접근하는 건 매우 위험하겠지만 이걸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일제나 친일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 만으로 신경질적으로 반응을 하기에는 사회적으로 친일청산이 이루어진 적이 없는 현실에 비추어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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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row to 역갤 블로그 at 1/04/2007 10:18:54 AM
제 의견은 단순한 글자해독이 아니라 전반적인 교육제도에 대해서 말하는것입니다. 학교에서 배운 '교육사의 연구'를 토대로 주장하는것입니다. 제가 조선인과 일본인의 교육이 차별했다고 하는 주장의 요지는 1905년 을사조약이후 통감부는 식민지교육의 기본정책을 수립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교육방법을 제정합니다.종래의 소학교를 보통학교라 이름을 고치고 수업년한을 6년에서 4년으로 줄입니다. 교과목은 본래의 것과 차이가 없으나 초급학년부터 일어가 부과되었지여. 또 관공립 보통학교를 확장하였는데..
그이유는 사립보다 관광립학교가 정부의 입김을 많이 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의 입장을 널리 확대하는것입니다. 중학교를 고등학교로. 고등학교를 최종학교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런 의견까지 놔왔다고 합니다. "그들 식민지 기초작업에 장애가 되므로 한국인은 전혀 가르치지 말라"라는 주장까지 나왔지여.
제의견은 일본때문에 한국이 못살았다라는 주장을 하는것이 아니라 조선인과 일본인의 교육이 차별되었다라고 하는점이 요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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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보 to 역갤 블로그 at 1/04/2007 09:01:16 AM
왜곡해서 비교하면 곤란합니다.
일본의 문맹율은 이미 에도시대부터 낮았습니다. 이건 조선통신사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고, 당시 일본 출판물의 판매수를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가령 인구 3000만명 수준의 19세기 일본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책(学問のススメ)이 300만부가 팔려나갔습니다.
인구 4000만이던 90년대의 한국에서 전여옥의 일본이 없다가 56주 판매 1위를 달성하여 300만부 팔렸던 걸 생각해보면 그 당시 일본의 문맹율이 얼마나 낮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도시 10%, 시골 30%.) 이 수치가 얼마나 낮은 것인가는 2003년 기준 한국 성인 문맹율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국성인의 25%가 글을 못 읽습니다. 한겨레 2003년 10월 8일의 기사를 인용해보죠.
「지난해 한국교육개발원이 만 19살 이상 전국 성인 3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초등학교 6학년 수준의 읽기·쓰기·셈하기가 전혀 불가능한 ‘완전 비문해자’가 8.4%로 나타났다. 또 조금 복잡한 읽기·쓰기·셈하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성인까지 포함하면 성인 4명 가운데 1명꼴인 24.6%가 비문해자로 조사됐다. ‘완전 비문해율’은 60~70대 노인으로 가면 무려 34~76%에 이르고, 농촌은 42%, 여성의 경우는 남성의 3배에 이르는 등 고령자·농촌·여성의 비문해율이 심각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럼에도 정부는 지난 50~60년대초 인구조사 과정에서 ‘편지를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식의 단순조사를 통해 나온 8~9% 문맹률에 그동안의 취학률 상승을 고려해 현재 비문해율을 2~5%로 추정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이런 수치를 근거로 해마다 발표하는 세계 각국 문맹률 순위에서 한국을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있다.」
그런데도 바보님은 차별교육 때문에 격차가 벌어진 것처럼 말하고 있군요.
그리고 조선의 일본어 해독율이 22%라며 차별교육 때문인 것처럼 말씀하고 계신데 이것 역시 왜곡이지요. 왜냐하면 이건 인구 전체의 문맹율이거든요. 한일합방 이전에 성인이 된 조선인까지 모두 포함이 된 인구입니다. 합방 이전에 성인이 된 사람들을 총독부가 무슨 수로 다 문자교육을 시킵니까?
실제로 해당 데이터의 출처가 되는 쇼와18년(1943년)의 총독부 자료를 보시죠.(http://www.jacar.go.jp/ 레퍼런스코드 B02031290300)
http://img296.imageshack.us/img296/5222/20060326114335197957498jq9.jpg
일본인을 제외한 국민, 즉 조선인의 국어(일본어) 보급율이 22.2%, 10세 이상인 사람에 대한 국어 보급율이 33.7%, 10세 이상 25세 미만의 남자에 대한 국어보급율이 7할(추정)이라고 적혀있습니다. 78%라는 수치는 위 자료에서 나온 것이고 이것을 인용했으면 위 총독무 문서의 신빙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서울대 김혜정의 논문은 미 군정청의 자료를 인용했는데 미 군정청의 자료는 이 총독부 문서를 바탕으로 작성됨). 그런데 문맹율로 일제를 비판하려면 일제가 교육을 담당한 세대에 한정해야 할 것이고 위 문서에 따르면 해당 세대는 70% 이상의 국어보급율을 보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문맹율로 조선총독부를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병합 이전의 조선이 마치 굉장히 문맹이 낮았던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건 조선을 방문했던 일부 외국인 방문자가 지나가다 본 얘길 무리해서 인용하는 것이지요. 조선총독부 도서관보 문헌보국 창간호(1935. 10)에 실린 이재욱의 약진 조선과 공개도서관(躍進朝鮮と公開図書館)에 의하면 조선의 비문맹퇴치자의 비율이 72.6%라 하고 있습니다. 이재욱은 해방후에도 국립도서관 관장을 맡은 인물입니다. 원래 조선의 문맹율이 낮았으면 도대체 이 수치는 어떻게 된 건가요? 총독부가 조선인 뇌속의 지식을 지우기라도 했단 건가요?
그리고 차별교육을 거론하는데, 당시 총독부가 조선인을 대상으로 국어(일본어) 교육을 안했나요? 의무교육으로 실시했는데 이게 문맹율 격차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기술교육의 차별을 거론하며 교묘히 바꿔치기하나요? 게다가 조선총독부는 한글교육까지 실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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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12년(1925년) 저작 겸 발행자 조선총독부 보이죠? 문화통치기에 조선인을 회유하려고 나온 공작이니 뭐니하지만 총독부는 무단통치기라는 1910년대에도 조선어사전을 펴냈습니다(1918). 후기에 들어서 일본어 우선 교육을 실시한게 사실입니다만 여전히 한국은 일선 학교에서 교육되고 있었습니다. 아래 자료를 보시죠.(레퍼런스 코드 A0203027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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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여자사범학교 등에서 쇼와16년(1941년)도에도 조선어의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교육된 한글을 무슨 수로 머리에서 지웁니까? 조선시대에 문맹율이 낮았다면 총독부가 무슨 수로 문맹율을 높인단 말입니까? 뇌속의 지식을 지우개로 지우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보다 명확한 근거를 토대로 주장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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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천재 to 역갤 블로그 at 1/04/2007 05:47:27 AM
우선 한가지 알야 할 사실은 해방직후 문맹률은 78%입니다. 다시말하면 일본어 해독가능자가 22%에 불과합니다. 일본은 당시 문맹률이 26% 정도입니다.
교육에 따르면 일본은 철저히 일본인과 차별화된 교육을 해 조선인 고급기술자가 생기는것은 원치 않았습니다. 북조선이 해방후 일본인 기술자를 머므르게 한이유도 그렇습니다. 그럼 생각을 해보십니다. 당시 지식인층이 겨우 22%인데 그들은 다 독립군 인가?아니면 친일파인가? 여기서 말하는 친일파란 일제시대 관직에 머므르고 있는자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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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보 to 역갤 블로그 at 1/03/2007 09:10:24 PM
티무르의 공식적인 칭호가 부마전하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황금혈통과 결합할 수 밖에 없던 군주의 선택이랄까요.
같은 것은 모스크바에서도 벌어집니다. 징기스칸의 후손에게서 정식으로 양위를 받아서 지배를 확립하게 되지요.
국내에서는 성골과 진골의 문제와도 같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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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여창 to 역갤 블로그 at 1/03/2007 06:48:33 PM
어 횽들 나 저런소리 안했는데
나는 옥울아육호형 글 인기 없어보이니까 차라리 다른거하라고 말했는데 왜저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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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암니옴니 to 역갤 블로그 at 1/03/2007 01:25:05 PM
물론 저야 일제시대에 면죄부를 줄 생각도 없고, 또한 일제시대가 무능한 조선인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어찌되었든 가해자가 일본제국이고 피해자가 조선이라는 점은 변함없습니다. 근본적인 책임은 병합을 한 일본제국에 있죠.
다만 너무나 단순하고 책임전가적인 한국인의 일제식민지관은 바뀔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일제시대에 관한 사실(fact)문제를 논하는 자리에서도 반일이라는 가치관을 마음껏 불어 넣어 사실여부에 관한 논의는 팽개치고 상대방을 친일파로 만들어버리는 대다수의 한국인을 볼 때마다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 사실입니다.
윗글에서 "그 당시 일제정부는 일본인들에게도 나쁘고 조선인들에게도 나쁜 정부였거든요"라는 부분이 있는데 제국주의 시절이 나쁘고 잘못된 시대란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만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나빴다고 해버리면 일제식민지 문제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위와 같은 전제를 깔아버리면 모든 것이 일본제국의 탓이고 일본제국이 잘한 것도 모두 조선인을 약탈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될 것이기 때문에 일제시대에 관한 연구를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누가 진지한 논의를 제의할 것이며 거부감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한국인의 맹목적이고 감정적인 대일관은 바뀔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일제시대와 같은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일본에 대한 비난보다는 그 당시 상황에 대한 연구와 객관적인 인식이 더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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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쪽빛 to 역갤 블로그 at 1/03/2007 06:09:50 AM
vista님의 말은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얘기겠지요. 현실적으로 이념이 먹고 사는 문제보다 앞설 순 없으니.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해방 이후의 잣대를 들이대며 몰아붙이고만 있으니 답답한 것도 사실입니다. 일제시대에 대한 진지한 고찰보다는 자신이 믿는 정의감과 분노에 불타 쉽게 인물을 단정짓고 역사를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일제 식민지를 겪게 된 이유는 당시의 조선인이 불의로웠기 때문이 아니라 무능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조선인에게 유능의 잣대가 아닌 정의의 잣대를 들이대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적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인이 유능의 잣대를 들이대진 않겠죠. 그 순간 한일합방의 책임에 대한 조선인의 책임도 인정하게 될텐데 이건 일본탓만 할 수 있는 정의의 잣대에 비해서 인정하기 힘든 일이거든요. 자존심 강하고 남 탓하기 좋아하는 성향으로 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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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쪽빛 to 역갤 블로그 at 1/03/2007 05:58:33 AM
역시 이 나라는 망하는게 좋겠어.
정의라는 건 숨결조차도 남아 있지 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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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usin to 역갤 블로그 at 1/03/2007 02:39:09 AM
당시 조선의 상황을 일방적으로 식민지 상황이라고 말하기도 힘듭니다. 게다가 현재 친일파청산을 주장하는 무리들의 친일파 기준과 그 기준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수 또한 독립운동가들의 수보다 훨씬 많은 숫자입니다. 그렇다면 깨달아야 합니다. 조선은 친일국가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독립운동 안하면 일제에 협조(동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상의 삶으로서 친일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항도 하지 않고, 오히려 생존은 물론이고, '출세의 목적'으로 친일을 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현재 일제시대 관직에만 있었어도 제국주의 침략에 동조했다며 친일매국노로 정죄를 하는데, 과연 그 시대에도 그것을 '죄'라고 인식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 시대 보통의 조선사람들의 조국은 망한 옛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었고, 친일은 애국이지 매국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총독부 관리가 되고, 일본인 회사의 사원이 되고, 군인이 되고, 경찰이 되면, 같은 조선인들로부터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존경을 받았을지언정, 친일매국행위를 했다고 욕을 먹은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높은 지위에 오르면 오를수록 조선인 출신이 일인들과 경쟁해서 그들을 이겼다 하여 조선인의 우수함을 증명한 '영웅'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렇게 친일해서 출세한 조선인 출신들이 다른 조선인들에게도 친일을 권장했던 것이고, 친일만 하면 우리처럼 출세도 하고, 부도 얻고, 일인들에게 차별도 받지 않고 그들 위에 설 수 있다고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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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VISTA to 역갤 블로그 at 1/02/2007 08:40:15 PM
...식민지 치하에서 독립운동 안하면 죄다 점령국에 동조한겁니까?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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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치찌짐 to 역갤 블로그 at 1/02/2007 07:40:54 PM
일제시대의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주는 건 너무도 당연하죠. 왜냐하면 그 당시 조선국내에 살던 전민중이 다 친일파였으니까요. 인간이라는게 자아실현의 동물이라서 당시 조선인들이 밑 바닥 인생만을 살 사람들은 아니거든요. 친일하고, 또 친일해서 왜인들의 학문과 기술을 습득하고 판사가 되고, 경찰이 되고, 군인이 되면서 출세를 하려고 한거죠. 당시 조선땅에 살던 거의 모든 조선인들이 자기 자식 일본인 학교에 보내서 일본말 배우고, 히라가나 가르쳐서 총독부 공무원, 동양척식주식회사 회사원, 황군 장교 만들라고 했지. 시골에서 왜인 순사들한테 괄시나 받는 촌부로 만들려고 했겠어요? 이거 중요한겁니다. 일제시대는 이전시대와는 달리 백정, 광대, 계집종년의 자식들도 학교교육을 받을 수 있던 시대였던겁니다. 누구든지 자기노력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출세의 길이 열렸던 거죠. 그래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일본제국주의에 협조적이었고, 일제말기 독립운동의 씨가 말랐던 겁니다. 다들 근대화의 단물을 누렸던 거죠. 만약 일제가 합병초기부터 그렇게 계속 강압통치를 했었다면 조선 전민중이 독립하려고 했겠죠. 그런데 진실은? 수십, 수백만의 친일파들이 득세한 게 바로 일제시대 조선이라는 나라입니다. 중국인들은 당시 조선인을 이귀자라고 해서 일인들과 동급으로 보고 두려워 했어요. 재만 조선인들도 어찌보면 다 일제의 위세를 등에 업고 친일하며 중국인을 탄압하고, 중국인의 땅을 강탈 한 사람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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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VISTA to 역갤 블로그 at 1/02/2007 06:52:39 PM
제가 알기론 소위 좌파 계열에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기랑 대적하는 자들은 싸그리 뭉쳐서 한나의 거대한 적으로 만들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용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마치 역갤 모씨가. 경상도 수구 친일 숭미 성리학 빠돌이 어쩌구하는거랑 마찬가지루요. 제가 잘못아는 건가요? 적어도 친일파 대다수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몰락했던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아는 사실과 정반대의 주장을 하시는 근거를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글의 전체적인 전제가 되는 부분인데 그 부분에 대한 설득력있는 답변이 없다면 글 자체가 사상누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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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로직 to 역갤 블로그 at 1/02/2007 03:06:50 PM
孤藍 眞明行님의 글에 성원을 보냅니다. 앞으로도 내공을 보여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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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해물과 백두산 to 역갤 블로그 at 1/02/2007 01:29:28 PM
하라미// LTCM이 맞습니다. ;;;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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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친고양이 to 역갤 블로그 at 1/02/2007 11:30:11 AM
발해가 처음에 '진국'이라 국호를 썼던 것이 마치 스스로 내세운 독자적인 것처럼 착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 '진국'이란 국호는 당나라가 걸걸중상에게 내린 '진국공'에서 따온 것임. 구당서에는 대조영이 스스로 진국왕에 올랐다고만 나와 있으나 신당서에는 대조영 이전에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각각 진국공과 허국공에 봉해졌다고 나와 있음.
이후 대조영이 좌효위대장군발해군왕에 책봉되면서 국호를 발해로 바꾼 것으로 봐도 초기의 진국이란 국호는 걸걸중상의 책봉명인 진국공에서 따온 것으로 봐야함. 그러므로 '진국'이란 국호를 마치 발해의 자주적 기상에서 온 것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함.
발해는 당의 등주를 침공한 사실이 있으나 이와는 반대로 숙위(인질)를 보낸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봄. 물론 발해가 보낸 숙위는 당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발해 스스로가 보낸 '충성 보이기용'이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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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나가다 to 역갤 블로그 at 1/02/2007 06:44:28 AM
조공책봉이 당시 중화문명권의 일반적인 외교관계는 맞으나 문제는 이것이 대등한 외교관계는 아니라는 거. 아무튼 당사자들은 이것을 종주국과 속국이 되는 것으로 여겼으며 이 문제로 전쟁까지 일어났던 사실들을 생각해보면 결코 조공책봉 외교를 대등하거나 그저 허울뿐인 것으로 비하할 수는 없다는 사실.
그러나 조공책봉 외교라고 해서 반드시 수직적 관계라 할 수는 없고 말 그대로 수평적 관계에 가까운 사례도 있기 때문에 성격 규정을 하나로 하기는 힘듬. 가령 고려가 중국에 대해 보여준 조공외교는 그 이후의 원이나 명에게 보여준 것에 비하면 말 그대로 형식에 가까운 것이고 또한 고려 마음대로 파기하거나 송에게 충고하는 경우도 있음. 이런 것들을 보면 조공책봉외교는 말 그대로 허울뿐인 것일 때도 있음. 따라서 조공책봉 외교는 무조건 종주국-속국을 가르는 기준이라고 주장하기엔 무리가 있고 양국관계를 검토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일 것임.
그러나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조선초기 공녀 진상이라던가 명나라의 각종 내정간섭행위 등을 볼 때 부정하기 힘들다고 봄. 또 무엇보다 조선인 스스로가 자신은 중국의 속국이라고 스스로 기록하고 있으니. 물론 그 후의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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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나가다 to 역갤 블로그 at 1/02/2007 06:11:11 AM
조공 과 책봉.....결국 사대주의적이긴 하고, 자존심 상하는 부분인데
이렇게 보면 어떨까요 ?
당시에 당, 명 , 청에 대한 관계는 지금의 유엔가입과 비슷한 관계다. 라고요
당시 중국의 국력이 압도적이다 보니, 유엔 사무총장 및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중국 혼자 차지한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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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부산사나이팬 to 역갤 블로그 at 1/02/2007 03:43:37 AM
죄송합니다 조금 답글이 늦네요.
최근 조금 집중 폭격을 자초한 일이 있어서
잠시 잠수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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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녁 to 역갤 블로그 at 1/01/2007 11:48:24 PM
걍 그만써 미안한 말인데 인기도 없잖아
차라리 다른걸써 1차사료 뒤져가면서 쓰는데 참 헛수고로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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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암니옴니 to 역갤 블로그 at 1/01/2007 10:23:00 PM
언젠가 이슬람 문자 배울려고 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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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암니옴니 to 역갤 블로그 at 1/01/2007 08:54:16 PM
발해가 당에 조공을 바쳤기 때문에 당의 속국이라고 한다면 당은 토번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이후 계속 조공을 바쳤으니 당 또한 토번(티벳)의 속국이었다고 해야 한다.
이이있으면 말해보아요!!!
송은 요의 속국 (송은 요, 거란의 명명백백한 지바를 받은 속국? 너무나도 많은 조공, 봉물들을 갖다 날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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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철 to 역갤 블로그 at 1/01/2007 08:26:54 PM
조선은 명의 속국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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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나가다 to 역갤 블로그 at 1/01/2007 01:19:35 PM
조선도 명의 속국 아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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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음냐리 to 역갤 블로그 at 1/01/2007 10:27:33 AM
아랍문자는 굉장히 복잡한 체계를 가진 모양이군요. 표에서 어두형·여중형 등이 나오는 걸로 봐서 같은 문자라도 단어상의 위치에 따라 다른 형태로 써야 하는 듯?
그리고 이슬람 옷을 입고 있는 소크라테스나 백양조 시대에 그려진 그림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나중에 기회되면 이와 비슷한 다른 그림들도 소개해주시면 감사히 보겠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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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1/01/2007 10:02:45 AM
의장용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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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랄라라 to 역갤 블로그 at 1/01/2007 09:45:31 AM
역갤블로그 회원님의 상기 포스트가 미디어몹 헤드라인에 등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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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디어몹 to 역갤 블로그 at 1/01/2007 09:26:45 AM
성경이나 다른 책을 쓸때 독일이나 이탈리아 지역마다 독특한 서체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봤습니다만, 동양이나 중동처럼 글씨를 위한 서예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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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yhn217 to 역갤 블로그 at 1/01/2007 08:50:35 AM
서튼후의 칼도 보고 싶네요~
그런데 어느 것이 원래의 투구인가요? 사진으로 봐선 모두 새것처럼 보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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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음 to 역갤 블로그 at 1/01/2007 05:45:13 AM
대충 봐도 굉장한 정성이 들어간 글이란 걸 알겠군요. 잘 읽었습니다~ ^^
전편인 이슬람건축편에선 결국 이슬람이 유럽건축을 따르는 것으로 끝을 맺은 것 같은데(물론 이슬람전통건축이라는 것도 동로마제국의 건축물을 모방한 것 같더군요) 미술 역시 유럽미술인 유화에 패배하고 말았군요. 안타깝습니다. T.T
그래도 이슬람 서예는 살아남았다니 다행스럽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예란 것이 한자문화권에만 있는 걸로 알았는데 이슬람문화에도 있었군요. 서체만 다양한 것이 아니라 장식용으로도 사용되었으니 당연히 우리의 서예 개념과 비슷할테구요.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럽은 우리와 아랍이 가지고 있는 서예의 개념이 없었나요? 물론 유럽에도 필기체 등 여러 글자체가 있지만 우리나 이슬람처럼 글자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뽐내기 위해 연습하고 써서 걸어놓은 모습을 본 기억이 없어서요...
제가 잘 몰라서 그러니깐 이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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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음 to 역갤 블로그 at 1/01/2007 05:41:15 AM
